혼전순결
혼전순결
  • 김보겸
  • 승인 2012.11.13 15:47
  • 호수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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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한 방식
2012년 10월 24일, 브라질의 ‘카타리나 미그니우리니’라는 여성이 자신의 처녀성을 경매에 내놓았으며 결국 78만 달러(약 8억 6000만원)에 낙찰되었다. 이 소식을 두고 사람들의 입에서 ‘어떻게 처녀성을 돈으로 환산할 수가 있느냐’, ‘사람마다 처녀성의 가치가 다를 수가 있느냐’ 등과 같이 여러 얘기들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개인의 가치관이나 관점에 따라 이 사건에 대한 찬반이 나뉘겠지만, 그 찬반 논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동정(童貞)’이라는 가치가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정과 관련하여 ‘혼전순결’ 또한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 동정을 잃지 않겠다’는 이 엄격한 규율은 어찌 보면 지금 우리 사회의 대학생들과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엄연히 성인(成人)의 자격을 얻은 이들에게 ‘혼전순결’은 지키든 말든 아무 상관없는 허울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 또한 같은 대학생이라는 점에서 혼전순결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또는 반대로 지키지 않아도 된다와 같이 딱딱한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고 애정이 싹트게 되다보면 스킨십의 강도도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높아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 단지 규율이라는 이유로 혼전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이는 한창 좋던 상황에 찬물을 끼얹는 일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의 성의식이 이렇게 변화하였다는 이유는 혼전순결에 대한 정당방위로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동정은 지금 이 사회에서도 여전히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동정은 성관계를 한 번도 갖지 않은 육체적인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진실된 사랑을 추구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남겨놓은 무언의 의지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혼전순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무작정 낡은 규율에 얽매이는 사람이라고 매도해서도 아니 될 일이다. 자유와 방종의 개념이 서로 다른 것처럼 지금이 아무리 연애가 자유로운 시대라 하더라도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것과 방종한 연애를 추구하는 것도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혼전순결은 자신의 자유로운 연애가 방종한 연애로 변질되는 것을 막는 하나의 수단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사랑하기 때문에 육체를 허용하는 것이지, 육체를 얻기 위해 사랑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혼전순결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진실된 사랑을 추구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혼전순결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기준을 육체로 삼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람마다 각자의 연애 방식이 있는데, 혼전순결도 그 방식 중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혼전순결을 주장하는 사람의 연애 상대는 어쩔 수 없이 금욕이라는 고행의 길을 걸어야 하겠지만, 이를 주장하는 사람도 지금 만나는 이 사람이 과연 나의 진실된 사랑인지에 대해 수없이 고민을 많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고민이 아름다운 것이다. 연애는 그 무엇보다도 사랑이 전제가 되어야 성립하는 것이지 단순히 상대와 내가 사귀고 있다는 그 명목만으로는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전순결은 그러한 사랑을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것이다.
김보겸(국어국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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