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湘祖師, 孤雲寺를 창건하다
義湘祖師, 孤雲寺를 창건하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3.03.04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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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湘祖師, 孤雲寺를 창건하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지난 2월 말, 나는 오랜만에 의성(義城)을 여행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 기회에 지인 몇 사람과 함께 고운사(孤雲寺)를 찾았다. 그러니까 내가 2010년 『내 고향 義城을 말한다』를 집필하기 위해서 들렸던 때로부터 3년여가 지난 후였다. 그러나, 언제 보아도 고운사의 위용(偉容)은 대단했다. 산문(山門)을 들어서면서 터널처럼 펼쳐진 ‘천년(千年)의 숲길’과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70여 末寺를 거느린 曹溪宗 16敎區 本寺

     그런데, 고운사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등운산(騰雲山)에 자리잡은 조계종(曹溪宗) 제16교구 본사로서, 70여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는 명찰(名刹)이다. 고운사는 681년(新羅 神文王 1년)에 화엄종주(華嚴宗主)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하고 그 이름을 ‘고운사’(高雲寺)라 하였는데, 그 후 최치원(崔致遠)이 여지(如智) ‧ 여사(如事) 두 스님과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라는 두 개의 누각을 짓고 이 사찰을 ‘孤雲寺’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孤雲’은 최치원의 호를 빈 것이다.

     고운사는 조선(朝鮮) 후기 숙종(肅宗) 이후로 계속 사세(寺勢)를 확장하여 나갔으며, 의성 ‧ 안동 ‧ 영주 ‧ 봉화 ‧ 군위 ‧ 선산 지역 등을 관장하는 대본사(大本寺)로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일주문(一柱門)을 들어서면서 맞게 되는 가운루가 고운사의 옛 시절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었다. 가운루는 계곡 위를 가로질러 서 있는 2층 누각으로서, 멋스럽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가운루는 계곡의 암반 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나무기둥을 얹고 마루를 깔아 아래층을 이루고 그 위에 다시 기둥을 세우고 공포(栱包)를 두어 팔작(八作)지붕을 올린 누각이다. 이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큰 규모인데,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다.

     가운루 왼 쪽 절벽 위에는 우화루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孤雲寺’라는 현판과 함께 ‘羽化樓’라는 현판이 운치있는 건물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 누각의 오른 쪽(서편) 외벽에 그려진 호랑이 그림이 특이했다. 나를 따라 호랑이의 눈동자가 옮겨오는 듯 하였다.

     가운루와 우화루를 지나 극락전(極樂殿) ‧ 연수전(延壽殿) ‧ 대웅전(大雄殿) ‧ 명부전(冥府殿)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었다.

     대웅전 아래에 자리잡은 연수전이 나의 발걸음을 멎게 했다. 이 연수전은 1784년(朝鮮 正祖 8년)에 칙령(勅令)을 받들어 임금의 강녕을 빌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의 크기는 3백66칸에 이르는 큰 규모의 것이었다. 또, 이 건물은 평면형태가 사찰의 다른 전각(殿閣)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왕실(王室)과 관련된 건물이기 때문인 것이라고 한다(의성군 편, 『義城의 山水』 중에서).

     대웅전 옆 약사전(藥師殿)에는 보물 제246호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이 모셔져 있었는데, 이의 재질은 화강석(花崗石)이라고 한다.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와 하동(河東) 쌍계사(雙磎寺)의 석가여래좌상이 목조(木造)임과 구별되고, 화순(和順) 운주사(雲住寺)의 석가여래좌상이 동조(銅造)임과도 구별된다고 한다(崔完秀 편, 『명찰순례 2』 중에서). 이 곳 석가여래좌상은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이 날, 나는 일행과 함께 고운사 산문을 나서면서, ‘의사조사는 누구인가?’라고 자문해보았다.

     智儼의 門下에서 華嚴宗을 배우다

     의상조사는 625년에 태어나 644년(新羅 善德女王 13년) 경주(慶州)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出家)하였는데, 661년 당(唐)나라에 건너가서 지엄(智儼 : 600~668)의 문하에서 화엄사상(華嚴思想)을 연구하고 671년에 귀국한 화엄종(華嚴宗)의 시조이다. 그는 원효(元曉)와 함께 신라 불교(佛敎)의 쌍벽을 이루어 준엄한 구도정신(求道精神)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그는 뒷날 고려(高麗) 숙종(肅宗)으로부터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 圓敎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의상조사는 676년(文武王 16년) 왕명(王命)에 따라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종을 강론,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을 개창하였다. 그런데, 부석사 창건에 얽힌 선묘(善妙) 낭자와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說話)가 우리의 흥미를 자아낸다. 의상이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화엄교학(華嚴敎學)을 펴기 위하여 도량(道場)을 세우려하자 종파(宗派)를 달리하는 수백의 무리들이 몰려와서 방해를 놀았는데, 그 때 선묘 낭자가 바윗돌로 변신하여 그들의 머리 위를 날으며 위협하자 겁을 먹고 흩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뜬바위가 된 선묘 낭자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이 사찰을 ‘부석사’(浮石寺)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선묘 낭자는 의상과 생시(生時)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가슴에 담고 바다에 몸을 던져 용(龍)으로 변하여 의상의 귀국길을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사찰 경내에는 부석사의 수호신(守護神)인 선묘 낭자의 진영(眞影)이 모셔진 선묘각(善妙閣)이 있다. 이 곳에 모셔진 진영은 의상을 사모하여 만든 옷함(函)을 들고 바닷가에 서 있는 선묘 낭자의 모습이라고 한다. 또, 무량수전 서쪽 언덕에 창건설화를 전해주고 있는 ‘뜬돌’(浮石)이 이채롭게 놓여 있다.

     그리고, 의상의 문하에서 오진(悟眞) ‧ 지통(智通) ‧ 표훈(表訓) ‧ 진정(眞定) ‧ 진장(眞藏) ‧ 도융(道融) ‧ 양원(良圓) ‧ 상원(相源) ‧ 능인(能仁) ‧ 의적(義寂) 등 열명의 대덕(大德) 고승(高僧)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우리나라 화엄종을 크게 선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불국사(佛國寺) ‧ 화엄사(華嚴寺) ‧ 해인사(海印寺) ‧ 범어사(梵魚寺) 등의 화엄종 사찰을 창건하고, 전교활동(傳敎活動)을 펴나갔다. 이로써 의상조사의 화엄사상이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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