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볼펜] 설렘
[백색볼펜] 설렘
  • 조수진 기자
  • 승인 2013.03.13 18:24
  • 호수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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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을 지속하기 위한 커피 한 잔이 필요

◇인연이란 건 참 오묘하다. 사람과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는 감정이 반짝이다가도 어느 순간 반짝이던 빛을 잊고 서로에게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를 들이민다. 특히 ‘일’을 사이에 두고 만난 인연에서 자주 벌어진다.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는 無의 상태에서 만난 사람에게는 ‘시간’을 준다. 상대를 판단 할 기회가 아닌 서로에게 맞춰 갈 시간을. 그러나 일을 사이에 두고 만난 사람에게는 ‘기회’를 준다. 몇 번의 기회를 준 후, 내가 세운 기준 선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대부분은 고깝게 본다. 그 후 카운트를 센다. 하나, 둘, 셋, 아웃. 그리고는 손이 살짝 저릿한 정도의 아쉬움을 남긴 채 목록에서 삭제한다.

◇대학에 와서 가장 걱정했던 건 인간관계였다. 서로 목적을 갖고 만나는 관계가 판치는 세상에서 과연 시간을 내어 줄 인연을 만날 수 있을지 걱정됐다. 이런 걱정을 안고 가장 처음 간 곳은 신문사였다. 군기가 바짝 들어 의자에 앉아 있던 내게 관심을 갖던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여긴 뭐지?’라는 생각이 들 때 쯤 손 하나가 커피 한 잔을 쓱 내밀었다. “드시면서 기다리세요.” 순간 참 따뜻했다. 아마 상대가 내게 기회가 아닌 시간을 줬기 때문일 거다. 함께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시간.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상대에게 커피 한 잔을 쓱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되뇌었다.

◇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난 어떤 사람인가. 상대에게 커피 한 잔을 내밀기는커녕 함께 일하는 후배에게 “하나, 둘, 셋, 아웃”을 연발하고 있는 듯하다. 일이 먼저가 아닌 사람이 먼저임을 잊은 채. 쳇바퀴 돌 듯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니 내가 사람들에게 갖던 설렘이 사라졌다. 설렘을 그리워 하지만 설렘은 찾아볼 수 없는 이기적인 잣대를 들이밀며 오늘도 열심히 기사를 마감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있다. 인간적이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삶의 대부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밖에 없는 일들도 가득 차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필자는 노희경 작가를 좋아한다. 그녀가 집필한 드라마, 책을 보면 온돌방의 뜨끈한 아랫목에 있는 것 같다. 처음에 설렘 없이 묶인 관계를 참 인간적이게 풀어나간다. 그녀가 쓴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유독 주인공의 나레이션이 많다. 특히 좋아하는 구절은 ‘설레임과 권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나레이션 부분이다. “일을 하는 관계에서 설레임을 오래 유지시키려면 권력의 관계가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자이거나 약자가 아닌, 오직 함께 일을 해나가는 동료임을 알 때, 설레임은 지속될 수 있다.” 우리가 상대에게 카운트를 세는 이유는 커피 한 잔을 나눌 동료라고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많아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리라. 우리에겐 지금의 인연을 지키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 위한 커피 한 잔이 필요한 시점이다.   

<秀>

조수진 기자
조수진 기자

 ejaqh2@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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