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7. ‘썸’의 감옥
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7. ‘썸’의 감옥
  • 김선교(철학·3)
  • 승인 2015.05.12 17:10
  • 호수 13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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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속에 갇힌 우리의 관계

 딱 아홉 개의 획. 원고지 한 칸에 쏙 들어가는 한 글자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노래의 제목이 되어, 골든디스크 본상을 수상하기도 하고, TV 프로그램의 소재로 다뤄지면 여지없이 그 주의 이야깃거리로 자리 잡는다. 2014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썸’이라는 단어를 한 해 최고의 유행어로 꼽는 것에는 누구도 이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 와중에 저 낱말이 진정으로 무서운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인간 실존의 선택까지도 제한한다는 점이다. 가령 누군가와 함께 저 단어의 테두리 안에 일단 들어가게 되면, 당신은 지인과 커피라도 한 잔 마신다거나 영화라도 한 편 보는 것에도 곤란함을 겪게 될 것이다. 당신을 그 곳에 가둔 수많은 시선들이 항상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썸’의 틀 밖에 있는 당신을 생각할 수 없다. “왜 걔랑 요즘 같이 안 다니냐?”, “너 왜 그 친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밥 먹냐?” 따위의 말들은 그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썸녀(혹은 썸남)’이 직접 당신의 행동을 문제 삼기도 한다. 뜬금없는 손가락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뜨끔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고작 한 단어의 발생이 가지는 힘을 절실히 실감하는 순간이다. ‘썸’이라는 어휘가 아무리 말랑하고 설레는 분위기를 풍길지라도, 그 말 자체는 분명 구속이 아닐 수 없다. 이전에는 우리에게 자유가 있었다.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행동을 내키는 대로 할 수가 있었다. 허나 지금의 상황은 인권 침해로 간주되기에도 충분할 정도이다. 신은 인간을 짓고 ‘보기에 심히 좋다’ 라며 감탄했다지만, 인간이 창조한 이 단어는 보기에 심히 좋지가 못하다.


이러한 처지에 놓여 있노라면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언어가 진실로 집이라면 자기 맘대로 들락날락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다리 두 짝 조차 마음 놓고 펴기 어려운 반 평짜리 ‘감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 곳에 수감된 사람이 발버둥 쳐도 수많은 간수들은 코웃음을 칠 뿐, 무고한 죄수를 해방시켜주지는 않을 것이다.


동시에 쇠창살 바깥을 자세히 살펴보라. 착시(錯視)를 일으키는 촘촘한 기둥들 사이로 각자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썸’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탄생은 그것의  사용자 모두를 가두었다. ‘내 꺼인 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1) 상태를 그 정의(定義)라고 한다면, ‘내 것’과 ‘내 것 아닌’ 사이, 그 연속적인 지점들 모두는 이제 고작 한 단어만으로 이해된다. 사고가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사고에 선행하는 셈이다.
 

칼 야스퍼스는 ‘우리는 언어와 더불어 비로소 사유할 수 있다’고 말했고, 비트겐슈타인은 ‘나의 언어의 한계가 곧 나의 세계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필자는 이 두 명제를 합쳐서 ‘언어의 한계가 곧 생각의 한계이다.’라고 이해한다. 언어 이론 중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은 이러한 ‘언어결정론’적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이 가설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언어학자 사피어와 워프의 실험에 따르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무지개의 띠가 몇 개냐는 물음에 제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무지개는 빛깔의 연속체이므로, 그 가운데 또렷한 경계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즉, 무지개라는 불가분적인 자연현상에서, 단지 제 모국어가 지닌 기본 색채 어휘 수만큼의 띠를 발견할 뿐인 것이다. (물론 ‘사피어-워프 가설’에서의 ‘언어’는 특정한 어휘뿐만 아니라 포괄적인 문법 범주 혹은 체계까지를 지칭한다.) 요컨대 세계를 사고하고 경험하는 방식을 언어가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언어결정론은 최근 언어학의 중심 기조는 아니다. 하지만 일상의 경험에 근거할 때 언어가 생각의 감옥으로 작용하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무릇 요즘의 건강한 젊은 남녀라면 어느 누가 감히 ‘썸’이라는 단어에서 자유롭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이미 단어가 세상에 출현한 이상 거기에 (자의로든 타의로든) 묶인 채로 있을 수밖에 없다. 자유가 박탈 상황에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충고하는데, 그렇다고 멋대로 탈옥하려는 시도는 감행하지 말기를. 남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다며 복수의 이성과 함부로 밥이라도 먹었다가는, ‘어장관리’의 이름을 가진 새로운 감옥으로 이감될 것이 확실하니까. 죄목은 ‘상호 배타적 사랑의 책임 회피’. 당신은 그 안에서 사람이 물고기가 되는 우스꽝스러운 우화의 어부가 된다. 자유를 향한 어떠한 몸부림도 도무지 소용이 없는 것인가. 아, 우리는 꼼짝없이 ‘말’의 감옥의 갇힌 자로 살아갈 따름이다.
 

주석  1) 올바른 표기는 ‘내 거’가 맞으나 어감을 살리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내 꺼’로 표기했다.

 

김선교(철학·3)
김선교(철학·3)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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