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말하는청춘의순간들 9. 과학과 철학의 교차로
철학으로말하는청춘의순간들 9. 과학과 철학의 교차로
  • 김성현(철학·3)
  • 승인 2015.05.26 03:32
  • 호수 13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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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레기’를 말하는 입이여, 침묵하라

‘문레기’를 말하는 입이여, 침묵하라

최근 유행하는 인터넷 신조어 중에 ‘문레기’라는 말이 있다. 문과를 거리낌 없이 쓰레기에 빗댄 직설화법적 표현이다. 문과 학문에 대한 이와 같은 조롱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못 된다. 일부는 문과 전공자가 대다수 갖지 못하는 학문적 실용성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취업시장은 일자리를 찾는 데 실패한 문과 전공 학생들로 이미 과포화 상태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문학이 자신의 위기를 주장해온지가 이미 오래다.


그러나 이러한 인문학 위기론에는 몇 가지 난점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인문학이 너무 오랜 과거부터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단순히 최근의 사회현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인문학은 르네상스 이래로 쭉 위기에 처해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이 비단 우주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놓았을 뿐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설정에까지도 지각변동을 가져왔음을 안다. 과학은 인문학의 모태인 철학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이래로 엄청난 영향력을 획득하였다.


철학이 고대의 것을 답습하거나 비판적으로 주해하며 “철학사는 플라톤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 운운하고 있을 때, 과학은 과거의 이론이 오류에 봉착하는 즉시 대안적인 설명들을 시도하면서 급속히 발전했다. 이론들의 폐기와 새로운 이론의 제시가 반복되면 될수록 과학적 설명은 보다 타당성을 얻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말하자면 과학은 진리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데에 점차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한편으로 철학은 일반인이 듣기로는 엉뚱한 소리나 해가면서 소일하는 듯이 비춰질 뿐이었다. 과학과 철학은 어째서 이리도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인가?
과학은 세계를 일종의 고정된 것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닫혀있는 물리계이다. 이곳에는 물리적인 요인 외의 어떤 것이 끼어들 틈이 없다. 온갖 것에 대한 물리주의적 설명과 환원이 시도된다. 인간의 사유방식에 대한 설명은 뇌의 신경생리학적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장비만 갖춰진다면) 관찰 가능하다. 우리가 어떤 과학 이론을 세웠을 때, 이론에 내포된 바와 관찰 결과의 부합 여부에 따라 해당 이론은 검증되거나 반증된다. ‘검증’과 ‘반증’, 이것들이야말로 과학적 이론의 채택과 폐기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반면 철학에 와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철학은 주로 관찰 불가능한 것만을 골라 주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철학이 꼭 현상의 기초 원리들과 관계하는 메타학문이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철학은 실제로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어떤 신비스러운 것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종 형이상학에서 등장하는 ‘실체(Substance)’ 개념 같은 것이 그렇다. 철학적 설명은 검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신비로운 개념들을 속속들이 내뱉는다. 도대체 그것들이 어째서 타당하거나 부당한지 우리에겐 알 도리가 없는 것만 같다.


그래서 과학철학자들은 차라리 철학이 세계에 대한 적합한 설명을 시도하는 과학에 대한 메타학문이 되기를 바랐던 것일 테다. 그러나 그리되면 이전까지 철학이 해명하기를 요구하였던 수많은 영역들, 형이상학이라든지 윤리학이라든지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심지어 콰인은 자연주의 인식론을 전개하며 철학과 과학의 경계를 아예 폐기처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철학은 이제 과학에 대한 메타학문도 아니고, 마치 과학에 완전히 잡아먹힌 듯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학문처럼 비춰지고 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경향을 이미 염두에 두고 『청갈색책』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과학의 방법을 안중에 두고 있으며, 과학이 하는 방식으로 물음들을 묻고 대답하려는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을 받는다. 이러한 경향이 형이상학의 진정한 원천이다. 그리고 철학자를 완전한 어둠 속으로 이끈다.” 과학이 취하는 방법은 ‘설명’으로서, 이는 객관적 기술이 아니라 단지 이론에 대한 정당화 작업일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정당화 작업에 불과한 것이 부분적이나마 진리를 보장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 형이상학의 원천이 아니겠는가? 실상 비트겐슈타인은 반철학적 경향으로부터 철학의 영역을 옹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과학이 설령 이 세계의 모든 ‘사실’들에 대해 해명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해명 불가한 것들의 영역이 그 너머에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가령 우리가 어떠한 행동이 옳다고 결정하는 것이나 아침놀을 바라보며 생생하게 느끼는 아름다움 등, 윤리학적·미학적 판단들에는 결코 과학적 설명들로는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그것들에 대한 ‘관찰 가능한 사실’ 따위는 애초 물리적인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것들은 언표 불가하며 단지 ‘드러날’ 뿐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을 마친 과학자에게 철학자가 침묵을 요구할 때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지 말고, 단지 드러날 뿐인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아라.    
 

김성현(철학·3)
김성현(철학·3)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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