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34> 김종진의 충고
역사고백 <34> 김종진의 충고
  •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9.22 17:21
  • 호수 13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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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김좌진과 나를 죽였는지 기억하라
▲ 1925년 중국 운남군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할 당시의 김종진

내가 세상을 떠난 때는 일제가 만주를 본격 침략하기 위해 한참 여러 특무공작을 꾀하려 했던 1931년 7월, 내 나이 31살 때의 일이요. 내가 숨진 곳은 중국에서도 가장 추운 북만주 벌판의 길림성 목단강시 해림역 근처. 나를 죽인 자들이 납치해 후미진 곳에 깊이 묻었으니, 내 동지들과 후손들조차 아직까지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소.

내 고향은 수려한 산하와 풍성한 포구가 있는 충남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 가을전어와 대하로 유명한 남당항이 지척이오, 만해 한용운 선생과 백야 김좌진 장군을 낳은 명승고적이지요. 내 나이 19살에 홍성군의 3·1 만세운동에 앞장서고 서울 중동학교에서도 비밀 출판활동을 벌여 일본 경찰의 추적이 심해지자, 이듬해 중국 봉천(지금의 심양)으로 망명길에 올랐소.

내 북경의 원로 독립지사 이회영 선생을 찾아갔는데, 선생은 향후 독립국가의 기둥이 될 나 같은 젊은이가 무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며 멀리 운남성의 성장에게 간곡한 편지를 써 주셨소. 그래 중국의 신식 군사학교로 명망이 높은 운남군관학교를 찾아 갔는데, 상해에서 배를 타고 또 기차로 갈아타며 40여일 만에 중국 최남단인 곤명역에 도착했지요.

그 후 교도대에 들어가 언어와 글쓰기를 비롯해 군사훈련을 2년간 받았소. 그리고 운남군관학교 16기로 입학해 고된 훈련을 거듭해 또 2년만인 1925년 마침내 장교로 임관하였소. 학교장은 나를 중국정부에 보내 큰일을 맡기고 싶어 했지만, 난 오래전부터 종형인 김좌진 장군과 함께 독립전쟁에 본격 참전할 의지가 굳게 있었기에 다시 북쪽끝 만주로 귀환하였소.

청산리전투의 영웅인 김좌진 장군은 북만주의 한인 자치단체인 신민부에서 군사위원장으로 활약하던 중이었소. 눈물로 반기는 종형에게 나는 독립전쟁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만주지역 한인들의 생활실태를 정확히 파악해 장기적이며 안정적인 군사기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했소. 그런 후 내 직접 8개월 동안 해림과 밀산, 백두산일대와 연길 등 만주전역을 순방하며 교민들의 실태를 조사했지요.

발로 만주산하를 밟고 눈으로 동포들을 만나보니, 정말 중국 토착지주와 일제 밀정들과 공산당들의 만행이 자심하더이다. 그래 개선안을 만들어 신민부를 자유연합적 자위단체로 바꾸니, 한족총연합회라 이름 하였소.

만주 동포들과 농민들의 호응이 커지자, 일제 밀정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불안해했지요. 소련식 중앙집권주의를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농민들의 자치조직 보다는 공산당의 권위와 영향력이 커지길 바랬는데, 우리가 방해한다는 것이지요. 급기야 이들은 한인 공산당원을 고용해 1930년 1월 민족영웅 김좌진 장군을 자신의 보금자리인 정미소에서 암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소.

이런 위중한 상황에 북경의 이회영 선생은 백정기·이을규 등 아나키스트들을 만주로 보내 나를 후원해 주었소. 다시 한족총연합회가 농민들 속에 들어가 모든 대소사를 농민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고, 자위대를 편성해 일제와 맞설 수 있었소. 공산주의자들은 또다시 우리 간부 수명을 몰래 암살하더니만, 1931년 7월 11일 나마저 납치해 살해하고 말았소. 그런 후 북경의 후원군들조차 내쫓았으니, 곧 저들의 세상이 되는 듯 했지요. 허나 이는 곧 만주를 통째로 삼키려는 일본 침략자들의 마수에 넘어간 것이니, 곧 9·18사변을 일으키기 위한 비밀공작이었던 것이오. 후손들이여, 나와 민족영웅 김좌진을 죽인 자들이 누구였는지 잘 기억하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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