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스승으로 거듭날 대학가의 교수사회를 꿈꾸며
진정한 스승으로 거듭날 대학가의 교수사회를 꿈꾸며
  • 박다희 기자
  • 승인 2015.11.10 16:17
  • 호수 14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앤더슨이 책상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외쳤다. “캡틴, 오 마이 캡틴!” 이는 진정한 스승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학생들은 신임 영어교사 키팅이 부임한 이후 인생의 큰 변혁을 맞는다. 명문 사립학교에서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만을 받았던 그들은 학생과 소통하는 키팅의 교육 방식에 큰 감명을 받는다. 이윽고 학생들은 현재를 즐기라는 키팅의 가르침대로 단조롭고 틀에 박힌 삶을 탈피해,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 나간다.

이처럼 ‘진정한 스승’은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학생들과 소통하며 삶의 가치를 제시하고 인도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하지만 대학사회에서 스승이란 말은 그 의미가 참 무색하다. 매년 오월이면 울려 퍼지던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를 다시 부르기엔 겸연쩍고, 마음을 전달한다는 명목 하에 준비하는 카네이션은 학생들의 인사치레에 불과하다.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라는 말이 학생과 소통이 부족한, 현 대학사회의 교수들을 절묘하게 나타내지 않나 생각한다.

이번 호 보도 1면에선 ‘교수의 학생 지도’에 관한 취재가 이뤄졌다. 우리 대학에 키팅과 같은 교수만 있으면 좋으련만, 교수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예상보다 많았다. 배려 없는 상담, 답장 없는 메일, 불 꺼진 연구실 등 공교롭게도 모두 ‘소통의 부재’에 관한 것들이었다. 취재 차 교수들의 연구실이 모여 있는 층을 둘러봤다. 활기찬 건물 외부와는 달리 어둡고 적막했다. 학생들의 발걸음이 끊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교수 연구실 정숙’이란 팻말이 궁색하게 느껴졌다.

사회심리학에 따르면 관계의 진전은 친숙성의 원리에 의해 일어나며, 친숙성은 단순한 노출의 반복을 통해 증가한다. 물론 단순한 노출은 공간적,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야 이뤄진다. 이런 맥락에서 불 꺼진 연구실은 교수와 학생 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일등공신이다. 교수와 학생 사이의 노출이 없으니 거리감이 생긴다. 어쩌면 ‘부르지 않는 교수, 찾지 않는 학생’의 현상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사실 강의 시간 외에는 별도의 교수 업무 시간이 규정돼 있진 않다. 하지만 교수 스스로가 학생지도에 열의를 갖고, 학생들과 소통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교수와 학생 간 관계의 퇴보가 지속되면 대학사회에서 교수는 스승은 고사하고 단순한 지식 전달자로서의 권위만 인정받게 될 것이다. 키팅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자. 학교 당국의 압력으로 교단에선 내려왔지만 그를 우러러보는 학생들이 있었기에 그는 여전히, 진정한 스승이었다. 학생들에게 외면당하는 교수가 어찌 교수라 할 수 있겠는가. 오 나의 교수님, 부디 가까운 ‘스승’이 돼주길 바란다.

박다희 기자
박다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32151637@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