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로 천태만상(千態萬象)을 표현하다
목소리로 천태만상(千態萬象)을 표현하다
  • 이도형
  • 승인 2019.03.20 00:04
  • 호수 14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우 강희선(58) 씨

 

Prologue
‘이번 역은 강남. 강남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기자가 매일 통학을 하며 듣는 음성이다. 직장인과 대학생뿐만 아니라,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접했을 음성이기도 하다. 어느 날 어김없이 지하철 역사 안내 음성을 듣던 중, 기자는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친구들 목소리보다 더 자주 듣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일까. 기계일까 사람일까.’ 기자가 수소문한 끝에, 이 음성의 주인공이 성우 생활 40년 차에 접어든 강희선(58) 성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하철 안내 방송을 넘어 수많은 목소리를 연기한 그를 지난달 26일, KBS 신관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 먼저 자기소개 부탁한다.
 
성우 강희선이다. 1979년 TBC (대구·경북 지역 방송사) 전속 성우 10기로 입사했고, 언론 통폐합으로 TBC가 KBS로 통합되면서 KBS 성우 15기로 활동했다. 7년 동안의 전속 생활 이후 지금까지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사람들에게는 짱구 엄마와 맹구 목소리로 유명하다. 그 밖에 지하철 안내 음성, 샤론 스톤, 미셀 파이퍼 등 많은 외화 영화 더빙을 했다. 이 외에도 참여한 작품이 많지만, 너무 많아 다 이야기할 수 없다.


▶ 성우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 직업인가.
 
구연동화, 더빙, 드라마, 연극, 뮤지컬 등.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 성우는 단순히 좋은 목소리를 넘어 다양한 목소리들을 연기한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성우는 연기력과 목소리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연기력이 더 중요하다. 과거에는 목소리 좋은 사람을 뽑았지만, 요즘은 목소리가 탁하더라도 매력이 있다면 뽑힌다.


▶ 성우를 20살이라는 어린 나이 때부터 시작했는데 그 계기가 궁금하다
 
고등학교 때 방송반 활동을 했었는데 그때부터 방송이 좋았다. 빠른 연생으로 19살에 서울예전(현 서울예대)에 입학하게 됐는데, 교수님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시더니 성우에 딱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말씀하셨다. 교수님의 말씀을 계기로 시험에 응시했고 합격해 성우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 성우 생활을 하며 일상생활 속에서 겪었던 특별한 경험이 있었는가.
 
감성이 발달돼서 그런가, 일반인들보다 희노애락에 대한 표현이 강한 것 같다. 일상생활이 남들보다 훨씬 반갑고 남들보다 훨씬 슬프게 표현된다. 그리고 특별한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쓸데없는 장난 전화가 걸려 올 때, 상대방의 말을 가만히 다 들은 후 ‘다 했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느 영화에 나올 법한 목소리로 답하니, 상대방이 놀라 먼저 전화를 끊었다.


▶ 가장 기억에 남거나 힘들었던 작업은 무엇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아무래도 더빙이다. 특히 <배트맨 2>의 미셸 파이퍼 역. 가장 공을 들였던 작품이었다. 극 중 배역의 성격이 4~5번 바뀌는데 바뀌는 성격들을 연기하는 것이 재미와 동시에 긴장감도 있었다.
반대로 가장 힘들었던 건 전속 성우 생활 말기 때 맡았던 라디오 드라마 주인공이었을 때다. 배역이 40대 여성이었는데,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그 배역의 인생과 감정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해 소화하기 힘들었다.


▶ 맡은 배역을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배역의 감정에 완전히 몰입하기 위해 노력한다. 연기하기 한 달 전부터 배역에 어울리는 음악을 듣거나, 녹음 당일 배역에 맞게 화장과 의상을 준비한다. 또한 감정 전달이 중요하기 때문에, 녹음 전 영화를 10번 이상 시사하며 배역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도록 노력한다.


▶ 지하철 역사 안내 역시 굉장히 오랜 시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노선이 TTS(인공지능) 음성으로 대체돼 아쉬울 것 같다. 지하철 역사
 
안내를 오랫동안 하게 된 비결과 소감이 궁금하다.
감사할 따름이다. 기존에는 민원이 들어오면 1년마다 성우가 바뀌곤 했는데, 다행히도 내가 맡은 것에 대해 민원이 들어오지 않아 97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TTS 음성 역시 사람이 낸 목소리이긴 하지만 각각의 말들을 따로 녹음해 뜯어 붙인 것이다. 그저 안내를 위한 안내가 된 것 같다. 또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아 아쉬운 감이 있다.


▶ 더빙이 점점 자막으로 대체되는 것에 아쉬움이 있을 것 같다.
 
아쉽다. 더빙 영화를 제작할 경우 우리말 보호에 도움이 된다. 자막 영화 볼 때 자막에 집중하느라 내용을 놓치곤 하는데, 작은 자막이 아닌 성우들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으니 눈이 피로하지도 않다. 방송국에서 이러한 더빙의 장점들을 반영해 앞으로도 더빙 영화를 많이 제작했으면 좋겠다.


▶ 본인을 ‘나는 ○○한 성우이다’라고 이야기하자면, 어떤 수식어를 붙이고 싶은가.
 
나는 목소리에 인성이 묻어 나온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좋은 목소리, 좋은 연기를 위해서는 바른 인성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미 있는 성우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목소리에서 인간미가 흐르는 성우가 되고 싶다.


▶ 본인에게 목소리란 어떤 의미인가.
 
목소리는 마치 지문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배역에 맞게 변해야 하기에 열심히 가꿔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목소리란, 마치 화장하듯 잘 가꿔야 하는 것이다.


▶ 본인만의 특별한 목관리 방법이 있는가.
 
특별히 관리법은 따로 없고, 혹사하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특히 성우에게 감기는 치명적이기 때문에 성우들은 감기에 걸렸을 경우 미안한 마음 없이 서로를 멀리한다. 또한 소리를 아끼기 위해 노래방 가서 노래도 잘하지 않는다.


▶ 앞으로 목표나 희망 사항이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성우 일을 계속하고 싶다. 일을 하다 당장 죽어도 될 만큼 성우라는 직업을 사랑한다. 300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누군가는 10년이 걸려 성우에 합격해도, 2년간의 전속 성우 생활이 끝나면 방송국에서는 프리랜서로 놓아버린다. 성우를 끊임없이 뽑고 있지만 성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성우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져서 동료들과 후배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과거에 많은 활동을 했던 나도 여전히 연기에 대해 목마른데 후배들은 어떻겠는가.


▶ [공/통/질/문] 마지막까지 자신과 함께 하고 싶은 ○○이 있다면 무엇인가.

 
부모님이다. 부모님은 내게 쉬어갈 수 있는 그늘이고 항상 내 편이시다. 그 누구도 부모님을 대신 할 수 없다.


▶ 마지막으로 대학생들에게 한마디 하자면.
 
지금 20대에도 꿈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좌절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하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인생에 ‘늦다’라는 것은 없다. 남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다. 지치지 말고 끊임없이 찾다 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지나친 자학이나 번민을 하지 말았으면 한다.


Epilogue
어렸을 때 즐겨 보던 애니메이션, 엄마와 함께 보았던 외화, 내일도 어김없이 듣게 될 지하철 역사 안내까지 인터뷰가 있기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그는 기자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우리 모두의 일상 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우들의 목소리는 눈으로 직접 볼 순 없지만, 언제나 우리의 일상을 함께 하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 성우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넘쳤으며 자신의 직업이 발전되길 누구보다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희망처럼 성우라는 직업이 활성화돼 앞으로도 이 세상의 다양함을 목소리를 통해 표현해 나가길 바란다. 오래도록 우리의 곁에서.
이도형
이도형 다른기사 보기

 twoshape@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