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을 넘어 민족 대표로
종교인을 넘어 민족 대표로
  • 유정호 칼럼리스트
  • 승인 2019.09.10 17:40
  • 호수 14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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⓶ 손병희(1861~1922)
▲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관리들의 부정비리와 열강의 침탈에 신음하던 민초들은 1894년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곡괭이와 죽창을 들고 일어섰다. 이들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이 동학이었다. 그리고 1919년 일제의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이라는 목표로 온 겨레가 한뜻으로 만세를 불렀던 3∙1운동의 중심에도 천도교(동학)가 있었다. 그리고 천도교의 중심에 손병희 선생(이하 선생은 생략)이 있었다.


손병희는 어린 시절 서자로서 많은 차별을 받았다. 그런 손병희에게 서자도 하늘처럼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가르치는 동학은 큰 충격이었다. 22살 동학에 입도한 손병희는 제2대 교주 최시형을 만나면서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아,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을 만든 최제우의 신원 운동과 함께 보국안민과 제폭구민 운동을 전개했다.


 그런 가운데 1894년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고 조선을 억압하는 모습에 손병희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우금치 전투에 참여했으나 크게 패하고 만다. 손병희는 일본군을 피해 달아나는 과정에서도 뛰어난 지도력으로 동학을 이끌면서, 최시형이 처형당한 후 1897년 제3대 교주가 됐다.
이후 손병희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 도움이 되고자 일본에서 서구문물을 배우고 국제정세를 익혔다. 그런 와중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병희는 일본을 도와줘 전승국의 지위를 얻어야 자주국가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 실천으로 이용구를 통해 회원 11만에 달하는 진보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가 송병준을 내세운 친일단체 유신회와 통합시키며 진보회를 친일단체로 변질시켜버렸다.


일본을 이용하려던 계획이 오히려 역이용당하면서 동학은 친일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손병희는 이용구를 쫓아내고 동학을 천도교로 바꿔 친일 이미지를 벗은 뒤, 수십 개의 학교를 인수하거나 지원하면서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박문사 인쇄소를 설립하고 만세보 창간을 통해 국민을 계몽, 자주국으로 나아가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기울어진 대한제국은 결국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고, 천도교도 일제에 의해 교세가 약해져 갔다.


이런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약소국들의 독립과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들려왔다. 손병희를 중심으로 하는 천도교와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이때가 독립할 수 있는 적기라 생각하고, 학생들과 연대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했다. 손병희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천도교 살림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에 필요한 경비 대부분을 담당하고,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3∙1운동이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렇게 시작된 3∙1운동의 정신은 광주학생항일운동, 4∙19의거,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이후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는 역사를 갖게 됐다.  우리의 역사를 크게 바꿔놓은 3∙1운동과 함께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처럼 모든 사람이 하늘처럼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손병희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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