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하다 보면 매번 같은 고민에 빠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더 넣어야 되나? 아냐, 벌써 세 숟갈 넣었으니 충분해. 근데 싱거우면 어쩌지?’ 바로 소금과 설탕, 고춧가루 등 요리에 들어갈 각종 양념의 양을 가늠할 때 말이다. 이 중차대하며 영영 그치지 않을 고민이 시작되면, 제발 뭐라도 기준이 있으면 좋겠다거나 ‘지난번에 어떻게 했었더라?’며 고민을 거듭하는 게 사실이 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 이야긴가. 내가 산 중닭은 단 한 번도 같은 크기와 무게의 중닭인 적 없으며, 지난번 사용한 진간장과 오늘 쓸 양조간장의 염도는 분명 다른데 말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내가 늘 되뇌는 말이 있으니 바로 ‘과난사불급(過難詐不及)’이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과유불급을 내 나름 비튼 말인데, 말 그대로 ‘양념을 넘치게 넣으면 모자라게 넣는 것보다 속이기 훨씬 어렵다’라는 얘기다. 왜 그래야 하냐고? 죽음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는 오늘날, 짠 음식은 대체로 용서받기 어렵다. 반면 음식이 싱거우면? 세상 모든 질병은 다 이겨낼 것만 같은 온화한 미소와 “아, 제가 심심한 간을 즐겨서요” 같은 능청이면 열에 아홉은 만사 오케이다.
하지만 이런 약삭빠른 팁도 미봉책에 불과할 뿐, 철학적 식탁이라는 우리 콘셉트에 맞게 간 맞추기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주제는 ‘대체 무엇이 적당한 간이냐’는 것. 우리는 늘 각자의 판단과 각각에 맞는 상황에 따라 나름의 타협책, 즉 ‘중용’의 기준을 찾는다. 누구와 식사를 하게 될지, 그 자리가 어떤 이유로 만들어진 자리인지 등에 따라 그 기준을 정하게 된다는 얘기. 상대가 싱거운 음식을 즐긴다면 아무리 짠 걸 좋아해도 적정선에서 타협하게 마련이고, 식사가 이뤄질 상황에 맞춰 자극적인 혹은 자극적이지 않은 메뉴를 선정하는 게 사람의 섭리다.
철학자 중에도 이런 ‘중간 맛’을 이야기한 사람이 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주인공. 그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나름의 목적을 추구하며, 이는 더욱 높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리고 이런 ‘수단과 목적의 도식’을 거슬러 올라가면 마침내 어떤 것의 수단도 아닌 ‘목적 그 자체’에 도달하게 된다. 이 목적은 어떤 것의 수단도 아니며 그 자체로 선한 ‘최고선’이다. 그럼 최고선은 대체 무엇일까? 그는 최고선이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행복 자체를 바랄 뿐, 결코 다른 무언가에 대한 수단으로 행복을 바라지는 않는다. 행복은 무절제하지 않으며, 쾌락과 도덕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는 ‘중용’에서 찾아온다. 가장 꼭대기에 다다르니 외려 극단이 아닌 ‘사이’와 ‘균형’을 찾게 된 것.
요즘만큼 자신의 기준과 잣대, 목표가 무너지는 시절도 없지 싶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과 점점 커져만 가는 자극 때문에 나의 주관을 만들어가기도, 그 기준을 지키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나름의 시사점을 던진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은 어떠하며 그 현실 속에서 나는 어떤 기준을 잡아야 하는지 살피고, 이를 통해 나름의 경계선을 긋는 작업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개념이 바로 ‘중용’이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사는 세상, 내 삶의 기준과 위치를 어디에 둬야 할지 고민하고 실천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