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곡을 벗어난 궤도에서
정곡을 벗어난 궤도에서
  • 이소영 기자
  • 승인 2022.01.04 15:22
  • 호수 14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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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문학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이 도서는 기자의 주관적인 추천 도서입니다.>

“삶의 가치를 의심했던 이에게" 

저    자    가즈오 이시구로
책이름     남아 있는 나날
출판사     민음사
출판일     2009. 07. 13.
페이지     p. 310

 

유능하고 합리적이면서도 조금은 비겁했던 지난날을 타협해 본 적 있는가. 그렇다면 유머와 부조리가 교차하고 허망함과 애잔함이 공존하는 이 책을 추천한다. 한 인간의 삶을 눈앞에서 보듯 설득력 있게 풀어낸 이 초상에는 인생의 황혼 녘에서 비로소 깨달은 잃어버린 사랑을 말한다. 그렇다고 그리 부정적이지는 않다. 사랑은 이미 지나가고 없을지라도 남아 있는 날에는 희망이 있다.


막연한 희망은 밀도가 없다. 하지만 작가가 풀어낸 희망은 독창적이고도 내밀한 기록이다. 영국의 저명한 저택인 달링턴 홀 집사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슨의 생애 첫 여행으로 문학은 시작된다. 사랑했으나 떠나보냈던 켄턴 양이 보내온 편지를 곱씹으며 그녀를 찾아가는 6일간의 여행에서 스티븐슨은 외곬이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회상한다. 


격동하는 유럽 사회 속에서 스티븐슨은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의 사랑마저 포기한 채 맹목에 가까운 충직함으로 달링턴 경을 섬기고 달링턴 홀을 지켜 왔다. 그렇기에 일과 주인에 대한 헌신에서 나오는 개인의 절제로부터 맡은 바에 대한 사명감과 성취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러나 달링턴 경이 나치 지지자였다는 진실 앞에서 명분과 신뢰가 무너지고 황혼기가 지나서야 인생과 사랑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스티븐슨 스스로 마치 3자인 양 서술한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인간성과 계급 문화를 무덤덤하고도 심도 있게 전달하는 장치로 작용해 흥미를 더한다. 


장소와 시간에 따라 차례로 이동되는 이 소설은 한 문장을 읽으면 머릿속에 들판이 생기고 두 문장을 읽으면 예쁜 마을이 생기는 매력이 있다. 작가만의 문체로 쓰인 배경 묘사를 통해 절제의 미를 엿볼 수 있다. 절제는 스티븐슨 인물 자체의 성격에서도 드러나며 궁극적으로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라고 한다.” p. 295

 

일주일은 7일, 그리고 6일간의 여행. 스티븐슨의 나이는 황혼이었으며 직접적인 배경 또한 황혼이었다. 이처럼 아직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것이 소설 모든 부분에서 강조되고 있다. 저녁은 아직 끝이 아니라는 가느다란 기대와 혹여 스티븐슨이 실패하더라도 그 여파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역설적인 희망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까지 동행한다. 


과거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으며 삶이 끝나기 전에 생이 찬란했던 순간은 정해지지 않는다. 과거가 찬란할지 미래가 찬란할지는 모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가능성이라 정의하며 전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유가 무엇이 됐든 삶의 지속은 가치 있는 것이므로.

이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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