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중매라는 신화
설중매라는 신화
  • 장두식(자유교양대학) 교수
  • 승인 2022.04.05 14:25
  • 호수 14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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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식(자유교양대학) 교수
장두식(자유교양대학) 교수

한동안 봉은사 홍매화에 흠뻑 빠졌었다. 추사체의 고졸미를 느낄 수 있는 판전(板殿) 현판도 감동적이지만 혹한의 바람이 다 물러나기 전에 환하게 핀 홍매화는 더욱 가슴을 뛰게 했다.


세한 시절을 견디고 피어나기 때문에 매화는 옛 선비들의 애완식물이었다. 매화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이육사 시인의 시 「절정」에 등장하는 ‘강철로 된 무지개’처럼 희망과 미래를 상징하는 나무였다. 그래서 많은 시인 묵객들은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를 최고의 매화로 칭송했다. 설중매(雪中梅)라는 신화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봄의 전령사라는 밝은 이미지의 매화가 시련 속에서 절개를 지키는 지조 높은 매화라는 이미지에 눌려버렸다. 매화 하면 설중매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구한말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은 「슬픈 봄매화(悲春梅)」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사람들은 눈 속의 매화만 좋아하고/봄이 핀 매화는 좋아하지 않는다/꽃은 시절에 맞춰 피어나건만/사람들은 이를 거슬러 키우려 한다” 매화를 일찍 개화시키려 집 안에서 키우거나 양지바른 곳에서 키우는 풍습을 비판하고 있다. 계절에 정직한 매화와 계절을 속이려는 사람을 대비 시켜 당시 인정세태를 풍자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봄이 온 후에 피는 매화나 늦겨울 눈 속에서 피는 매화나 모두 매화이다. 매화는 언제나 매화의 정체성을 잃지 않지만, 사람들의 갈라치기 때문에 설중매라는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신화 때문에 매화의 본성은 사라지고 설중매라는 가면이 매화를 덮어버리는 엉뚱한 현상이 일어난다. 눈앞에 보이는 삼월 홍매화도 아름답지만 눈 속에 핀 이월 홍매화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 보편화된다면 신화가 현실이 돼버린다. 현실이 신화에 먹히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유원의 양자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석영이다. 그는 친동생 이회영, 이시영과 함께 독립운동사에 크나큰 업적을 남겼다. 이들이 삼한갑족이라고 일컬어지던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인 것은 정직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역사의 흐름이 항상 올바른 곳으로 향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이 믿음대로 역사의 순리에 따라 살았다. 역사도 이야기이고 역사가는 항상 신화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한두 명의 재주나 선동에 의해서 바뀌지 않는다. 역사는 그냥 올바른 방향으로 흐를 뿐이다. 그리고 그 흐름이 정의다. 설중매라는 신화는 옛 문인들의 고담준론 속에 나온 스토리텔링이다. 설중매가 매화가 될 수 없다. 매화는 항상 매화이고 설중매는 매화의 한 포즈이고 표정일 뿐이다. 매화가 언제 어느 곳에 피어 있든 아름다운 꽃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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