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
  • 단대신문
  • 승인 2023.12.03 17:33
  • 호수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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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로서 살아가는 주체적인 삶에 대하여

다음 기사는 우리 대학 철학과 융합철학워크숍 2조의 게재 요청에 따라 게재된 기사입니다. 

 

* 단대신문과는 무관합니다. 

 

 

철학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다시보기’다. 철학은 바쁜 일상 속 대수롭지 않게 넘긴 문제들, 무심코 지나쳤던 중요한 생각들을 다시 ‘사유’라는 그물로 잡아채고 살펴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건강한 철학은 세상 속 우리의 위치를 재확인시키고 방향을 재설정하게 만든다. 같은 이유에서 ‘취재’도 철학과 통한다. 취재란 기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질문을 던지고, 깊이 공감하고, 그 의미를 밝게 비춤으로써 그 대상을 ‘다시 보게’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적 취재’란 언제나 우리 일상에서 빠진 적 없이 함께했던 존재들, 그럼에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여기지 않고 무심코 넘겼던 존재들의 의미를 다시 조명하고 생각해보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 수많은 대상이 거론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성 소수자’를 밝게 비춰 보기로 했다.


 성 정체성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내면을 구성하는 본질이며, 건강한 개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정체성이다. 그러나 성 소수자들을 부정하는 여론은 성 소수자에게 어떠한 시선도 주지 않거나, 혹은 아주 거칠고 공격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모욕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구조적인 문제를 뒤집을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성 소수자들 역시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며, 다른 점이 있더라도 서로 상처를 주는 일 없이 존중과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시선이 필요하다. 
 이에 단국대학교 융합철학워크숍 2조는 성 소수자들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일이 어떠한 일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단국대학교의 한 성 소수자 학우 A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 1부. 단국대학교 학우 A의 이야기(대면 인터뷰)

 

“어쨌든 인간도 인간으로서 부대껴야 하는 거잖아요.”

 

단국대학교 성 소수자 학우 A에게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지를 물었다. 퀴어문화축제는 다양한 성적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축제다. 이 축제에서 성 소수자들은 거리에 나서서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밝히고, 자신과 비슷한 다른 참가자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면서 스스로 큰 격려와 영감을 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퀴어 축제에서 매번 빠지지 않는 세력은 성 소수자뿐만이 아니다. 집회를 반대하는 일부 기독교 세력도 그 거리의 한 자리를 가득 메운다. 일부 기독교에서 동성애란 곧 신의 말씀을 어기는 죄악이고, 일부 신자들에게 성 소수자는 죄인으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보통 퀴어 축제가 열릴 때면 그 자리가 축하와 환호만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대개 성 소수자 세력과 일부 기독교 세력이 충돌하는 불편한 잡음이 함께 섞인다. 


  A는 올해 개최된 퀴어 축제에서 겪은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A는 축제 장소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무지개 깃발을 흔들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일부 기독교인들은 A를 노려보고 소리를 지르며 위협을 가했다. 그런데 그때 A는 우연히 기독교 관련 유인물을 깔고 앉아 있었는데, 이를 본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가져가려면 A에게 직접 말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죄송한데, 혹시 이거 좀 빼도 될까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크게 고함치고 위협을 가하던 그들도, 막상 A의 얼굴을 직접 보고 말할 때는 아주 조심스럽게 부탁했다고 한다. A 역시 그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며 유인물을 돌려줬다. A는 해당 경험을 떠올리면서 “어쨌든 인간도 인간으로서 부대껴야 하는 거잖아요.”라고 말하며, 아무리 퀴어와 기독교가 서로 적대적인 관계여도 막상 서로를 직접 마주할 때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하게 대해주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또한, A는 축제를 즐기러 온 성 소수자들이 주변 카페에 가득 몰렸던 일화를 떠올리면서, 하나의 일상적인 장소를 본인과 같은 사람들로 채워나가는 현장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A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커뮤니티가 하나의 공간을 점유하고, 우리만의 공간 그리고 우리가 여기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 인상 깊은 경험이었다고 덧붙였다.

 

“지금까지의 규칙성 바깥에 있는 삶에 대한 상상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A는 성 소수자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가 아직도 보수적이라는 점에 아쉬움을 표하며 “사람들이 이제는 평범하지 않은, 지금까지 있었던 규칙성 바깥의 삶에 대한 상상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필요가 없도록’ 사회의 시선이 변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A는 자신도 소수자성을 가졌음에도 가끔은 비슷한 소수자성을 가진 사람조차 납득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두가 전부 납득하고 살 수는 없더라도 “그냥 납득 못 하겠다는 사람도 서로를 받아들이고 부대끼고 살 수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A는 성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좀 더 따뜻하길 바라고, 서로 다른 가치관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끼리도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어울리는 삶을 원한다고 마무리했다. 

 

“나도 타자화되는 집단의 일원이구나. 그래서 이름이 붙는 사람이구나.”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이란 스스로 인식하는 자신의 성별을 말한다. 지정 성별과 성 정체성의 일치 여부에 따라 일치하면 ‘시스 젠더’, 불일치하면 ‘트랜스 젠더’로 구분된다. 성 지향성(sexual orientation)은 성적 끌림의 대상을 의미한다. 성적 끌림의 대상에 따라 이성애자, 양성애자(바이 섹슈얼), 동성애자, 무성애자, 범성애자로 구분된다. 
 A는 자신을 양성애자 여성이라고 소개하며, 자신이 여자도 좋아한다는 것을 중학생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남자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한다는 걸 단순히 알고 있는 것과 ‘양성애자’인 걸 알고 있는 것은 다르다고 말했다. 자신을 양성애자로 정체화한다는 것은 양성애자 집단의 일원이 되고, 그 집단의 문화를 공유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A는 자신의 정체화 과정에서 자신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인식과, 양성애자라는 한 집단에 소속된다는 인식은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즉, 성 소수자 집단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이 그 집단의 일원이라는 인식은 없었던 것이다. A는 이후에 페미니즘을 접했을 때,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여성이 자신과는 다른 것 같다는 이질감을 느꼈고, 이후 성 소수자의 이야기를 접하는 과정에서 큰 공감을 얻으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A는 자신 또한 ‘타자화되는 집단’의 일원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내집단이라고 여기던 퀴어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온 기분이더라고요.”

 

A는 자신이 양성애자로서 혼란스러웠던 경험을 소개했다. A는 자신을 소개할 때 레즈비언이라고 말하게 된다고 하면서 자신이 아직 양성애자라는 용어를 명확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여성이 남성을 좋아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여겨지지만 여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 보니, 남성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여성을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이 더욱 부각되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A는 이성과 교제했던 일화를 덧붙였다. A는 자신이 남자와 교제한다고 해서 양성애자라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퀴어 사회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이성 연애로 인해 자신의 당사자성이 사라지는 게 아님에도 기만자가 된 것 같은 혼란을 겪었다고 말했다.


 
“결혼제도보다 시민 결합같이 좀 더 광범위한 의미의 가족 제도가 정착되길 원해요.” 

 

A는 우리 사회의 결혼제도에서 동성혼 또한 합법화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A는 이러한 결혼제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시민 결합과 같이 광범위한 의미의 가족 제도가 정착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즉 결혼이라는 전통적 관습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애정과 사랑에 기반을 둔 가족이 아닌, 그 이외에 감정으로도 가족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시민 결합은 동성결혼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써 제시되는 제도로, 기존의 결혼제도에 동성 커플을 편입시키는 대신, 동성 커플의 사실혼 관계를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

우리는 성 정체성의 차이, 성 지향성의 차이, 나아가 나와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차이점이 존재함에도 우리는 우주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 자신의 가치관과 다름을 이유로 다른 이들을 멸시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즉, 서로를 비난하기보다 이토록 다른 우리가 어떻게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끊임없이 부대끼며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이기에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휴머니즘의 진정한 가치를 또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2부. 또 다른 ‘우리’의 이야기 (Q&A)

융합철학워크숍 2조는 성 소수자의 주체적 삶이라는 취재 주제를 심화하기 위해 타 학교의 성 소수자 학우와 비대면 질의응답을 시도했다. 

 

-자기소개, 본인의 성 정체성과 지향성에 대하여

"저는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이고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4로 시작합니다. 적어도 이 인터뷰에 응할 수 있을 정도로는 퀴어인 것 같지만, 그래도 퀴어 중에서는 정상성-중심의-사회에 수혜를 많이 받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퀴어 의제에 관한 스탠스도 좀 안일한 면이 있고요. 제가 모든 퀴어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MBTI는 ENTP입니다. 고양이와 강아지 중에서는 강아지를 선호합니다. 아주 귀여운 여자친구가 있는데, 이 인터뷰 답변을 작성하는 시점에서 사귄 지 777일이 되었습니다. 축하해주세요!
 (*정체성: 내가 누구인지, 지향성: 누굴 사랑하는지) 저는 시스 젠더 여성이고 섹슈얼한 연애는 여자하고만 가능합니다. 대충 레즈비언이라고 소개해도 되지만 정확성을 기하자면 바이로맨틱 진섹슈얼로 갈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헤테로가 아닌 것을 깨달은 건 중학교 3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2 때 짝사랑하는 여자애가 있었는데 이때만 해도 그냥 장난인 줄 알았어요. 그 이후 모든 연애 감정을 장난처럼 치부하게 돼서 연애할 때마다 고생했지만, 여튼 중3 때쯤 되어서 퀴어에 대해 자세히 알고 나서 “이제 보니 나 레즈인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동성애, 양성애 외에 무성애나 범성애 등의 다양한 젠더에 대한 견해
"지향성 알고리즘 차트를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네모 박스에 예를 들어 ‘축구를 좋아합니까?’라고 쓰여 있고 예, 아니오로 이어지는 화살표를 따라 또 다른 박스로 이동하다가 마지막에 자신의 카테고리에 도달하는 표) 이를 적용시키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는 비슷한 경로를 거치다가, ‘자신과 같은 성의 사람에게 끌림을 느낍니까?’라는 분기점에 와서 서로 갈라져 각자의 카테고리로 들어갑니다. 반면 무성애자와 동성애자는 ‘섹슈얼한 끌림을 느낍니까?’ 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저는 남자한테는 섹슈얼한 끌림을 느끼지 않기에 쉽게 이해가 가능합니다. 반면 범성애자를 다른 지향성과 가르는 질문을 만들기는 까다롭습니다. 범성애자는 단순 ‘나는 여자·남자, 트랜스젠더 모두 좋아’ 가 아니라 물질적인 기반을 전혀 핵심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근본적인 정신적 사랑을 추구합니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처럼 어느 날 갑자기 갑충이 되어 버린 연인이라고 하더라도 사랑할 수 있다더라고요. 정신이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의 본질이고, 그 사람이 처한 물질적 조건은 단순히 우연적이라는 종류의 생각이 충격적이었어요. 저는 남자가 정말 성(性)적으로 싫기에 제 여자친구가 갑자기 남자의 신체에 갇히게 된다면 안타깝게도 그 신체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는 온갖 젠더들을 한데 묶어 퀴어라고 명명하는 일부터가 꽤 멍청한 일 같습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지향성 이야기만 하고 정체성 얘기는 하나도 안 했는데 이건 또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저는 제 정체성을 의심한 적이 없어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는 얘기하기가 어렵지만 만약 제 정신이 어떤 남자의 몸에 갇히게 된다면 진짜 성전환 수술을 하고 싶을 것 같아요. 이런 얄팍한 사고실험 따위만으로 다른 퀴어성에 대한 이해가 정말 가능한 걸까요? 어려운 문제죠. 애초에 퀴어와 ‘일반인’은 섹슈얼리티 혹은 젠더란 원리적으로 범주화할 수 없는 그 무엇은 아닐까요?"

 

-추천하는 퀴어 관련 작품, 퀴어의 결혼과 행사 및 지원에 대한 생각

"<벌새>는 어떨까요? 이 영화를 퀴어 영화라고 분류할 수는 없지만, 주인공이 학교 후배와 퀴어한 관계를 맺는 장면이 짧게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은희와 유리의 관계가 레즈비언 사랑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아가씨>의 뜨겁고 절절하고 미화된 세기의 사랑이면 퀴어랑 좀 안 친한 사람이라도 쟤넨 여자지만 서로 사랑하나 보네, 할 수도 있겠죠. <벌새>에 나오는 연애는 좀 당황스럽습니다. 아니, 동성애이기 이전에 이것도 사랑으로 쳐줘야 하나요?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얄팍한 이성애 관계에 거리낌 없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나요? 행사나 정책은…, 커플 할인, 체험 등을 동성까지 확대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정상성에 편승하는 아이디어를 퀴어 정책 추천이랍시고 내놓아도 되는 걸까요? 아무래도 어떤 퀴어도 배제하지 않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습니다. 퀴어 퍼레이드도, 무성애자인 지인과 가면 에이엄 플래그가 새겨진 굿즈를 사주고 싶은데 충분히 다양하지 않아서 아쉽더라고요. 퀴어 안에서도 좀 위계가 있고 소외되는 집단이 있습니다. 무성애자나 논바이너리 같이 가시화가 덜 된 정체성/지향성을 겨냥한 재미있는 행사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결혼… 저는 정말로 결혼하고 싶어요. 윤이형 작가의 <승혜와 미오>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나는 결코 엄마가 될 일이 없을 텐데, 승혜는 가끔 생각했다. 왜 내 안에 모성을 닮은 부분이 있는 걸까? 나더러 어쩌라는 것일까? 알 수 없고 혼란스러웠으므로, 승혜는 그 부분을 락앤락 용기에 담아 냉동실에 넣듯 자신의 깊은 곳에 집어넣고 가만히 두었다.’ 이 작품 속 승혜라는 인물이 저를 많이 닮았다고 느껴요. 퀴어로서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비정상성과 사회화든 그냥 사람이 우연히 그런 것이든 정상성을 선망하는 일면이 충돌하는 지점이 늘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 페미니즘 면에서 결혼 자체를 타도하는 게 화끈하고 바람직한 해결책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성애 중심의 세계관도 뒤집히고, 낡은 가족제도같은 구습들도 물리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정상적인’ 결혼을 원합니다.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가 찾아오는데, 퀴어를 위해서 결혼이 좋다 싫다로 명확히 입장을 정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비정상성 계열에 속하면서도, 정상성으로의 편입과 정상-비정상 이분법의 타파라는 두 가지 상충되는 욕망을 동시에 지니고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트랜스젠더와 페미니즘을 둘러싼 오랜 갈등도 이 지점을 건드리고 있고요. 답을 내릴 쉬운 논의는 아니지만 이 모순을 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 소수자가 바라보는 성 소수자에 대한 시각

"저는 성 소수자 당사자 중에서도 관련 이슈에 굉장히 무던하고 또 안일한 편입니다. 이유는 제가 젠더 측면에서는 소수자에 속할지라도 인적, 경제적 자원 등은 비교적 풍요롭게 누릴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성 소수자들은 대체로 저보다 불편한 게 많아 보입니다. 예를 들어 ‘~밍아웃’ 같은 신조어를 쓰지 말자는 담론에 저는 공감을 안 하거든요. (저 자신도 솔직히 그 용어가 아주 편하다고 생각하기에) 또 혐오자 세력에 대해서도 큰 불쾌감이나 거부반응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 집단도 성 소수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대한 내부적 근거를 갖고 있고 (여기에 당연히 동의하지 않지만) 그걸 믿는 이유나 심정 정도는 이해가 가거든요.
 하지만 저처럼 ‘이해심이 뛰어난’ 성 소수자의 의견을 너무 전면에 내세우는 것보다 예민하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게 더 좋습니다. 그래야 아주 급진적인 주장들이 전면에 나오면서 첨예한 대립과 비판이 나타나고, 온건한 해결책을 마련할 계기도 생겨나니까요. 저보다는 더 치열한 고민 속에서, 소수자에 대한 여러 차별을 몸으로 직접 부딪히고 겪으면서 살아온 사람의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본인이 넣고 싶은 퀴어 슬로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 

"‘정상이기보다 이상하기가 더 쉽다’같은 건 어떨까요? 비-퀴어이려면 굉장히 많은 조건을 만족해야 하거든요. 오히려 시스 이성애자의 비율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에 가끔은 위화감이 들 정도예요. 어떻게 딱 재생산에 적합한 종류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도록 조절했을까요? 자연선택이든 뭐든 그 원리가 궁금한 건 사실입니다. 특별히 의식하지 않을 뿐이지 아마 젠더가 정상성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아도 여러분은 어딘가 한 군데는 이상할 거예요. 젠더가 얼마나 자의적인 개념인지 생각하면 되게 웃기고 혼란스러워집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여자가 키가 큰 남자를 선호하는데, 키가 작은 남자를 선호하는 사람이 키작남-지향성-퀴어로 분류되어 차별받기도 한다면 얼마나 이상할까요? 그만큼 이 의제 자체가 뭔가 모 아니면 도로 딱 떨어지거나 과학적이거나 일률적인 게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게 시작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오래 고민해야 하는 사안이 많은 것 같고요. 같이 고민합시다!"

 


안규용, 김강민, 김민경, 박찬원, 이다연, 이민채, 이상혁(단국대학교 철학과 융합철학워크숍 2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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