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20대의 비망록(備忘錄)-스크린과 공간 속에 담겨지는 진심”
⑤ “20대의 비망록(備忘錄)-스크린과 공간 속에 담겨지는 진심”
  • 이원상(도시계획·부동산·05 졸) 대한주택공사
  • 승인 2008.11.04 14:11
  • 호수 1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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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야말로 공간을 가치 있게 바라보는 방법

▲ 제니 스위니(16세): 모계가 노르웨이와 수족인디언 혼혈계이며, 부계는 아일랜드계로 인종적 구분이 무의미함을 대변한다.
나는 ‘도시 및 지역계획’을 대학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공간과 지정학적 세계관의 구도, 그 충돌과 파국 그리고 그 속에 숨어 있는(시점에 따른) 이항적 애정과 지독한 사랑을 스크린과 나의 시네마떼끄(cinematheque) 친구들에게서 배웠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이들이 나에게 ‘진심’으로 그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난니모리떼(Giovanni Moretti)의 ‘나의 즐거운 일기’ 첫 번째 에피소드를 목도한 것은 학부시절 어느 깊어가는 겨울날이었다. 스쿠터를 타고 이태리 로마를 질주하는 바로 그 ‘모리떼’의 작품을 나는 한남벌(서울캠퍼스)에서 집으로 돌아온 늦은 시간 졸린 눈을 비벼가며 보았던 것이다.

당시 나의 메모(2003)는 이렇다. “이태리 로마의 지리학, 문화와 역사의 형상화 그리고 연속적인 문화의 위치가 지리학적 풍경에 의해 그 위상의 판이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온갖 철학 담론의 가벼운 거론과 현대사회에 대한 짜증을 지극히 개인적인 사색의 차원에서 채워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오비타니’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이상 메모)

나는 당시 일본의 ‘오비타니 유리’가 대지진으로 시가지와 주택가가 철저하게 파괴된 일본의 ‘고베’를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배회하며 만들어낸 작품(제목 : 닿을 수 없는 거북함)을 줄곧 떠올리고 있었다. 청년 오비타니 유리가 불타고 무너진 ‘고베’로 기어이 가서 그 곳의 소년·소녀들을 만나면서 청춘의 무료함과 인생의 덧없음을 철저하게 무너진 도시공간의 형상에 빗대어 이야기할 때 그것이 가벼운 농담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륙의 한 끝인 이태리에서 그곳의 중년 작가가 스쿠터를 몰며 자기 동네-공간 속을 망중한의 기분으로 활보하며 필름에 담은 것은 다름 아닌 공간 속에 담겨있는 이태리 역사공간에 대한 근심이었다. 이것은 공간 안에서 진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는 작가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 두 작품은 나의 공간적 고민이 그들의 방법론적 사고의 틀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 경험을 하게 했다. 이런 식의 접촉-목록을 나열한다면 밤을 새워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사실 하룻밤이란 얼마나 짧은가.) 2004년 독일 슈피겔 TV의 ‘장벽의 붕괴’를 통해서 정치지리의 부도가 상대의 시각에서 새롭게 재편된다는 것과 위정자들의 권세보다 민중의 힘이 더욱 위대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파트리씨오 구스만(Patricio Guzman)의 ‘칠레전투’ 3부작을 통해서 재확인했다. 저 비열한 피노체트 군부가 칠레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 대통령 관저를 향해 탱크의 포격을 시작한다. 이 작품의 첫 씬(Scene)은 암연과 같은 깊은 어둠이다.

▲ 줄리델피: Agnieszka Holland의 작품 중에서 독일 유겐트 청년을 사랑한 비극적 히로인으로 출연한다. 독일군 청년은 사실은 유대인이었으며 그들의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충돌의 공간은 이들의 갈등 무대가 된다.
이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실제로 스크린은 검은 색지와 같이 서 있으며 곧이어 탱크의 포격이 시작되면서 민초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은 사회주의 정부의 불타는 대통령 관저가 등장한다. 16mm 카메라(Eclair camera)와 나그라(Nagra) 녹음기를 들고 파트리씨오 구스만은 전투를 하듯 필름을 돌린다.

파렴치한 우파 자본 세력의 악랄함을 민중들이 서 있는 공간에서 맹렬히 바라본 것이다. 파트리씨오 구스만의 진심은 바로 칠레의 민중사회 공간에서 표출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그네츠 홀란즈’가 독일군 병사가 된 한 유대인 소년을 통해서 제국의 공간적 야욕을 비웃을 때, ‘베르너 헤이쪼그’가 16세기 스페인의 장군 ‘아귀레’를 내세워 식민지 남미 황금의 땅(엘도라도)을 찾아나서는 그 긴 여정이 남긴 것이 결국 아마존 원주민들의 대학살과 팽창해가는 야만적 제국주의의 광기임을 두 눈 뜨고 똑똑히 바라보라고 말할 때, G.W 파브스트가 ‘동지애’를 통해 아직 전쟁 중인 상대 국가의 인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무너진 탄광 안으로 함께 들어가는 이들이야말로 인류가 원하는 데탕트라는 것을 트래킹하는 카메라를 통해 그 좁은 공간을 비추면서 말할 때 그 곳에는 어떤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러한 진심이야말로 공간을 가치있게 바라보는 방법임을 배우게 되었다. 이제 나는 진심을 걸고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20대에 무엇을 배워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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