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
⑬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9.03.03 23:43
  • 호수 12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입지(立志)보다는 용기가 앞섰던 정조

“‘입지(立志)’ 즉 뜻을 세우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곳에 이르는 근본이 됩니다. 공자 같은 성인도 처음에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五志學]’는 ‘지(志)’ 한 글자에서 시작하였으니, 뜻이란 위대한 것이며 가르쳐 주신 말씀은 변하지 않는 정론입니다. 또 한 가지 깊이 탄식하는 것은 안자는 공자에게 가장 근접하는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쳐다보면 더욱 높아지고, 뚫어보면 더욱 단단해진다’는 감탄이 있었으니, 하물며 보통 사람이 성인을 바라보는 것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아득하여 붙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항상 앞서고, 분발하여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는 후퇴하기 쉬워, 훌륭한 재주를 가졌어도 성취한 사람은 드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병통을 고치려면 용기에 책임을 지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입지’ 두 글자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용기는 입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지만, 용기는 재빨리 나아갔다가 신속히 물러나는 것이 입지처럼 안으로 쌓이고 튼실한 것만 못할 우려가 있습니다. 입지라는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새기고 그 의미를 터득해야만 비로소 진보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비록 재주가 보잘 것 없지는 않지만 매양 뜻이 강하지 못함을 걱정하여 뜻을 세우려 해도 세워지지 않고 시간은 흘러가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법칙을 얻었으니 어찌 힘쓰지 않겠습니까? 나를 이끌어 연마시켜 주기를 여러 빈료(賓僚)들에게 바랄 뿐입니다.”

둥궁(東宮) 시절의 정조가 스승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글의 제목은 「답빈객(答賓客)」 즉 빈객에게 답한다는 뜻인데, 빈객(賓客)이란 왕세자의 교육을 전담하는 시강원이란 관청에 소속된 정2품 관리를 말한다. 정조는 1762년 사도세자가 사망한 직후에 왕세손의 신분으로 동궁이 되었고, 시강원의 관리로부터 왕위 계승자가 갖춰야 할 학문과 덕행을 교육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열한 살이었다. 이후 동궁은 학문에 몰두하다가 의문이 생기거나 나름대로 터득한 것이 있으면, 스승에게 편지를 보내어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 편지는 정조가 입지(立志)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스승의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낸 것인데,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자신은 열다섯 살에 학문을 연마하여 성인이 되겠다는 뜻을 세웠다고 했는데, 일생을 노력한 결과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공자의 일을 이루는 것은 쉽지가 않다. 안자(顔子)라면 스승이었던 공자도 그의 학덕을 인정한 인물인데, 그런 안자가 ‘스승은 쳐다볼수록 높아지고 다가갈수록 멀어진다’고 탄식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조는 모든 일은 이루려고 하는 의지에 달려있음을 강조했다. 처음에 정조는 무엇보다도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공자가 이룩한 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를 따라갈 수 없다는 좌절감이 앞서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면 강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뜻을 세우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정조는 생각을 바꾸었다. 용기란 과감하게 앞으로 나갈 수는 있지만 그런 용기는 꺾어지면 쉽게 물러서는 경향이 있다. 이에 비해 뜻을 세우는 것은 용기만큼 즉각적인 실천력은 크지 않아도 온갖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지구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새 학기를 맞은 캠퍼스에는 활기가 넘친다. 신입생은 앞으로의 대학생활을 구상할 때이고, 재학생은 금년 한 해의 계획을 세우고 실천할 때이다. 정조의 말처럼 학생들 스스로가 각자의 뜻을 굳건히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씩 전진해 나가길 기대한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