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법자는 할 말이 없다
범법자는 할 말이 없다
  • 조영갑(언론영상·3)
  • 승인 2009.09.16 01:05
  • 호수 12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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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다. 아침에 눈을 떠 습관적으로 음악을 튼다. MP3에 담겨 있는 음악들은 스피커를 타고 늘어진 정신을 팽팽하게 당긴다. 문득 플레이리스트에 눈길이 간다. MP3 음악 폴더 에 있는 노래 중 70% 정도는 ‘N’ 포털의 개인 블로그에서 내려받기 한 것. 음반을 살 필요없이 간단한 검색만 거치면 듣고 싶었던 음악을 무한정 내려받기 할 수 있었던, ‘화수분’ 같은 그 포털을 한때 예찬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N포털에서 노래를 내려받던 시절은 아련한 추억이 돼 버렸다.

올해 초,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등이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대형 포털들에 수십억원 대의 민사소송을 제기하면서 포털들이 내부 단속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오래된 음원 같은 경우, 제법 품을 들여 찾아보면 간혹 내려받는 게 가능하지만 그 외의 경우는 철저히 봉쇄되어 있다. 씁쓸한 마음으로 “쩝”하고 입맛을 다시는 찰나, 책장이 눈에 들어온다. 새 학기를 맞아 책장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미친다. 이미 그 ‘효용가치’를 상실한 지난 학기의 교재들이 퇴출대상이다. 모아놓고 보니 양이 제법이다. 그런데 유난히 조악한 디자인의 교재가 눈에 많이 띤다. 제본이다. 복사실에서 8천 원을 주고 산 한 교재의 원가를 검색해봤다. 1만 2천원. 25%나 싸게 산 셈이다. 원본이 고가일 수록 제본을 구입하는 게 더 남는 장사다.

지난해 문화관광부가 발간한 보고서 ‘도서 불법 복사·복제 실태’에 따르면 제본으로 인한 출판사들의 총 손실이 연간 840만권, 1500억원 어치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대학가에서 이런 말들은 남의 얘기다. 불법 복사로 인해 출판사들이 고사한다는 말은 ‘그들의 명분’일 뿐, 싼 값에 책을 사는 ‘나의 실리’에 견줄 만한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교재 정리를 마치고 책상에서 공부를 하다가, 머리를 식힐 겸 만화를 본다. 친구가 메신저로 전송해 준 일본만화다.

새삼 세상이 참 좋아졌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 친구와 나는 일종의 ‘만화계’를 붓던 죽마고우다. 만화책 한 권의 가격이 부담스럽던 초등학교 시절, 친구와 나는 각각 절반을 부담해 한 권을 공동으로 소유하곤 했었다. 한꺼번에 사기 힘든 시리즈물을 사기에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부담스러운 가격의 시리즈물은 지금 P2P(파일공유)사이트에 들어가면 pdf파일의 형태로 차고도 넘친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려받아 모니터 앞에 앉아 즐기면 그만이다. 정말로 세상은 좋아진 것 같다. 만화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최근 만화가들은 불법다운로드로 인해 한국 만화시장이 위축되고 있다며 P2P업체를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이들 업체로 인해 2003년부터 6년 간의 피해액이 2000억 원에 이른다는 주장이다. 만화를 다 보고 나자, 또 다른 유혹이 고개를 쳐든다.

‘주말인데, 영화 한 편 보고나서 천천히 공부해도 되잖아’. 주말이므로, 동영상 파일이 담긴 폴더를 연다. 얼마 전까지 상영했던 영화가 그득하다. 모두 영화광인 사촌이 보내 준 것이다. 사촌이 몸담고 있는 영화클랜(그곳에서는 갓 출시된 영화 DVD를 파일로 만들어 배포한다)과 메신저 업체에 경의를 표하며 영화에 집중한다. 관람료 8000원(주말가)을 아끼는 셈이다. 책상 위에 펼쳐놓은 신문기사에 머쓱해진다. “<해운대>… 유출 하루 만에 중국에서 불법 DVD 판매” 국내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콘텐츠의 70~90%가 불법 복제물이고, 연간 국내 저작권 침해 규모는 2조원을 넘는다고 한다(동아일보). 내 하루의 상당부분이 불법으로 이뤄져 있고, 이 불법활동들이 모이고 모여 엄청난 돈이 된다고 하니 모골이 송연해 진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눈 앞에 아른거리는 실리(實利)는 대단히 힘이 세다. 프랑스처럼 인터넷 접근권을 제한하는 정책이라도 취해야 근절될 수 있을까. 범법자인 나는 할 말이 없다. 조영갑(언론영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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