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입이 심심할 때, 손이 심심할 때 우리는 간식을 찾는다. 가볍게, 너무 많이 먹어서 부담스러울 일도 없고, 먹다 질리면 언제든지 그만 먹을 수 있는 스낵은 항상 인기가 좋다. 이러한 스낵만의 매력은 콘텐츠에도 적용된다. 지난 2015년에 탄생해 페이스북, 네이버TV 등 각종 SNS에서 인기를 끌며 어느새 유튜브 구독자 수가 약 19만 명에 달하는 스낵컬처의 대표주자 `72초 TV’. 이들이 만들어내는 공감과 재치로 가득 찬 3~4분 내외의 짧은 영상은 모바일 콘텐츠 시대라는 순풍에 힘입어 젊은 층의 호평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72초 TV, 그리고 스낵컬처라는 새로운 콘텐츠 성장의 주역이 있다. 바로 72초 TV에서 기획과 연출을 담당하고 있는 연출가 진경환(37) 씨. 연기자로서 영상에 직접 출연하기도 해 ‘도루묵’이라는 이름으로도 익숙한 그를 지난 2월 14일 서울특별시 삼성동의 (주)칠십이초 사무실에서 만났다.
▶유학을 다녀왔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벨기에에서 공연 이론을 공부하다가 파리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사실 한국에 있으면서도 연출 작업을 하긴 했지만, 하는 일이 반복적이고 지나치게 체계적이라고 느껴 유학을 가게 됐고, 그 과정에서 공연을 보는 시각이 넓어진 것 같다. 공연이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뮤지컬, 연극처럼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것들 이외에도 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공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공연에 대한 개념이 커졌다고 해야 할까, 좀 더 큰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연출가가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맡고 있는지 설명해 달라.
일반적으로 영상 제작과정은 영상 기획, 대본 구성, 촬영 전반을 기획하는 프리 프로덕션, 본격적으로 촬영을 하는 프로덕션, 편집 등의 후반 작업을 하는 포스트 프로덕션을 거치게 된다. 연출가는 이 과정 전체를 아우르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연출의 역할은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어로 연출을 미장센이라고 하는데, 풀이해보면 센(scene) 안에 무엇인가를 배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무슨 장면에 어떤 배우를 쓸지, 어디서 촬영할지 등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효과적인 선택지를 연결해 하나의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연출가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72초 TV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72초의 전신 격인 ‘인더비’라는 창작집단에서 시도했던 많은 콘텐츠 중 하나가 바로 72초 프로젝트였다. 이후 대중들에게 가장 관심을 많이 받았던 72초 프로젝트를 주력으로 이어나간 것이다. 우연하게도 우리가 72초 콘텐츠를 시작했던 시기가 미디어의 수요가 모바일 쪽으로 많이 넘어오던 시기와 맞물려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
▶72초 TV는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영감을 얻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
72초 TV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영상은 그 영상을 만드는 기획자나 작가 본인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들,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영상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공감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할 것 같지만, 사실 그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결국 공감을 위해 따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풀어냈을 때의 결과물이 공감이 되는 것이다.
▶소재를 찾는 것과 그것을 영상화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것 같다. 영상을 제작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기존의 영상콘텐츠는 텍스트, 즉 대본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영상을 만들 때 이미지나 음악 같은 다른 요소에도 대본만큼 똑같은 비중을 할당하려고 신경 쓴다. 그 결과물로 율동적이고 음악적으로 보이는, 청각에 집중한 영상이 나오게 된다.
▶72초 TV를 통해 표현하거나 담아내려고 하는 것이 있다면.
평범한 것들, 우리가 쉽게 놓치는 것들을 짚어주려고 한다. 그냥 평범해 보일 수 있는 것들을 약간 다른 시각으로 보는 순간 굉장히 특색 있게 다가오는 경우를 그려낸다. 사실 ‘72초’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질문을 많이 받는데, 이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흔히들 60초나 100초처럼 의미가 있거나, 특별하게 생각되는 숫자로 이름을 지으면 그 이름에 대해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72초같은 아무런 의미 없는 숫자로 이름을 지으면 그때부터 사람들이 72라는 숫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72초 TV에서는 이렇게 평범한 것들에서 특별함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담아내려 한다.
▶방금도 얘기가 나왔지만, ‘새롭게 보는 시각’을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통 새로운 시각을 얘기할 때는 ‘아웃 오브 박스(Out Of Box)’라고, 한발 물러서서 보는 자세를 강조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룩 인 팟(Look In Pot)’, 즉 어떤 것에 대해 깊게 파고드는 방법을 선호한다. 우리 주위에는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정말 많다. 그 누구도,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고 있던 것들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다 보면 그 핵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 순간 대상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갖게 된다. 지금도 계속 그런 식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영상이 긴 것이 수월할 것 같은데, 특별히 짧게 시간의 제한을 둔 이유가 있나.
짧은 시간 안에 영상을 풀어내야 한다는 조건이 제약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떤 이야기를 만들 때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영상의 구조인데, 오히려 주어진 시간이 짧을수록 그 구조가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 또 그런 점들이 영상의 재미로 이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72초 TV를 시작하고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처음 시작하던 때가 아닐까 싶다. 처음 드라마를 오픈하고 좋은 반응을 얻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가 추구하는 ‘새로운 재미’를 공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확신을 얻은 순간이었다.
▶콘텐츠 기획자이자 연출가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72초의 영상 중에 ‘두 여자’라는 콘텐츠가 있는데, 그 영상만의 특색을 다른 창작물로 재생산하고 싶어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옷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하면서 그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차도 마시고 얘기도 나눌 수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 형식의 공간을 준비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영상에서 상품이 파생되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브랜드를 통해 새로운 영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시도해보려 한다.
▶[공/통/질/문] 본인을 표현하는 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늘색이다. 사실은 그냥 지금 눈에 띄는 테이블이 하늘색이라 그렇게 답했다. 원래 뭔가를 정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건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일부러 나에게 특별한 이유를 붙여가며 색을 입히고 싶지 않다.
▶마지막으로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최근에는 콘텐츠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실제로 만들기도 쉬워졌기 때문에 그만큼 경쟁 속에서 돋보이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것보다는 잘 시도하지 않는 것을 찾아 발전시키면 치열한 경쟁에서도 조금은 쉽게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이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남들 다하는 걸 똑같이 가지고 경쟁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나은 방법일 것이다.
Epilogue
3~4분짜리 영상에 비쳤던 그의 모습은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웃음을 자아냈다. 영상 전체에서는 그의 탁월한 유머 감각과 정교한 구성이 묻어났다. 하지만 이 가볍고 웃음기 가득한 영상 뒤에서, 콘텐츠와 연출을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는 말을 반복했다. 연출에 관심을 두게 된 것도, 프랑스어를 전공하게 된 것도, 유학을 가게 된 것도, 지금의 칠십이초 동료들을 만나게 된 것도 모두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서 콘텐츠를 만들고 연출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 문득 생각나 다시 보게 된 1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영상 안에는 연출가 진경환이 그대로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