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하는가
어떤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하는가
  • 김희량 패션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06 17:07
  • 호수 14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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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외 기사에서 ‘2022 SS 최악의 트렌드’라고 소개된 컬렉션 중 일부다.출처: Fountainof30
▲ 한 해외 기사에서 ‘2022 SS 최악의 트렌드’라고 소개된 컬렉션 중 일부다.출처: Fountainof30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는가? 난 그랬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웃으면 내 외모를 비웃는 것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젠 극복했지만, 지금도 자신감 넘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둥근 머핀 같은 뱃살을 볼 땐 더욱 그렇다. 이 복잡하고 시끄러운 시대를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외모에 대한 고민으로 크고 작게 마음고생 해봤을 것이다. 연예인 정도는 돼야, 아니 심지어 연예인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름다움에 대한 잣대다. 아름답기 위한 기준은 현대사회에서 특히 잔혹하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모두 좋아하고, 추구하고, 집착하는 이상이다. 아름다움은 인류의 역사와 오랫동안 함께했다. 시대에 따라 그 정의가 달라져 왔지만, 대체로 아름다움은 황금비율과 같은 균형과 대칭, 조화의 개념과 연결된다. 반대로 못생김, '추(醜)'는 불균형, 비대칭, 비정형, 부조화 등과 연결된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지향해 마땅한 가치였지만, 추는 아니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추는 다른 지위를 갖게 된다. 생각해보면, 현대예술은 온통 추에 대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피카소의 그림은 아름다움의 전통적인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피카소의 입체주의 작품은 균형이나 비례에 대해 말하지 않고, 현실을 비정상적으로 비튼 형태가 나타난다. 하지만 왜곡된 모습에서도 다양한 색채와 불규칙한 규칙이 피카소의 작품을 아름답게 만든다. 철학자 칼 로젠크란츠는 "아름다운 추"를 언급하면서, 추를 아름다움 일부로 포함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처럼, 추는 아름다움과 대조적이면서도 어우러질 수 있는 개념이었다. 특히 다양한 시도가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현대사회에서 추는 또 다른 미적 가치가 됐다. 


추가 많은 주목을 받은 분야는 단연코 패션이다. 예전부터 추는 패션의 주요 먹거리였다고나 할까. 패션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갈망한다. 익숙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회에 추 한 숟갈은 매번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됐다. ‘어글리슈즈’처럼 못생기고 투박한 디자인이 시크한 매력을 얻어 유명세를 치렀고, 저급한 스타일을 자랑스레 내놓는 키치 스타일이 주목받았다. 이제 현대패션에서 추는 당연한 요소가 됐다.


해외 디자이너 키코 코스타디노브는 서울특별시 동묘에서 우리나라 아저씨들의 등산복 패션을 보고 매우 감탄하고 간 적이 있다. 채도가 높고 선명한 색의 등산복과 배 끝까지 추켜올린 하이웨스트 수트 바지의 믹스 매치가 그야말로 패셔너블하다는 것이었다. 동묘의 아저씨 패션에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코스타디노브의 작품(2019 S/S)을 보면 아저씨 패션의 새로운 매력이 보인다. 이 패션은 나름의 미적 규칙을 담보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저씨 패션’이라는 낙인 때문에 새롭고 독특한 미적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악마가 즐겨 입는다는 프라다도 '추'를 잘 활용하기로 유명했다. 프라다는 몇십 년 전부터 아름답기 위한 규칙에 어긋난 디자인을 시도해왔다. 배색의 원리에 맞지 않는 색 조합을 과감히 사용했고, 낯설고 생소한 소재를 활용했다. 우리에겐 익숙한 나일론 가방이 당시 럭셔리 패션으로선 혁명적인 소재였고, 장식으로 쓰이는 레이스를 온몸에 뒤덮어버린 것 역시 참신한 시도였다. 프라다는 전통적인 미적 기준 바깥을 점유하며 낯섦과 불편함을 줬다. 이 감정들은 기존의 미적 기준을 다시 생각하고 새로운 범위를 제시하는 자극제였다. 패션은 못생김을 통해 결국 독보적인 미적 가치를 생성했다. 


패션이 추구한 추는 패션이 다루는 미의 범위를 넓혔다. 패션은 아름다움에 대한 사회의 견고한 기준에 파묻히지 않았다. 미학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추는 견고한 규칙을 향해 반항하고, 배타적인 구분을 경계하며, 테두리 바깥의 소외된 것들을 포용한다. 패션이 활용한 추도 그랬다. 추가 예술이 됐기에 우리의 미적 기준도 확장되고, 더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만약 정해진 대로 아름답지 않아 슬픈 사람이 있다면, 이런 말을 건네고 싶다. “패션의 세상을 들여다보면 못생김 천지인데, 그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미’는 완벽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각자의 적당한 추를 포용한 특별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당신은 아름다움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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