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대신문, 그 1500번의 발자취를 쫓다
단대신문, 그 1500번의 발자취를 쫓다
  • 이용현·구예승·이다경 기자
  • 승인 2023.03.07 16:58
  • 호수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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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대신문 75년 발전사

Prologue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단대신문, 75년 동안 어느덧 1500호까지 발행하며 우리 대학을 표상하는 언론기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그 지면 한 장 한 장에는 우리 대학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단국을 담아냈던 본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1. 창간~100호
단대신문의 초석을 다지다

1948년 개교 4개월 뒤 창간호
한국전쟁 때 휴간했다 곧 복간

낙원동에서 한남동으로 이전
1959년 100호, 8면 발행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이든지 시작을 하기 위해선 철저한 준비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기에 생겨난 말이다. 단대신문은 창간 이래로 조금씩 체제를 잡아가며 현재의 초석을 다졌다.

 

학생 언론의 첫 발걸음을 내딛다
우리 대학 개교 4개월 뒤인 1948년 3월 1일, 학생회 문화부로부터 <단대학생신문> 창간호가 처음 발간했다. 이는 현존하는 국내 대학신문 중 5번째 창간이다.


4면 월간 발행 체제로 시작한 본지는 이후 1948년 10월 31일 단국대학교의 공식 기관으로 인정받았으며 학생 언론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30일 ‘단대학보’로 제호를 새롭게 변경했다. 당시 대학신문의 명칭을 ‘학보’로 통상표기한 시대의 흐름에 맞춰 대학 신문의 현대적인 출발을 알린 본지는, 1961년 3월 다시 ‘단대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본지의 활동이 서서히 틀을 잡아가기 시작할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 여타 학보들처럼 전쟁의 여파를 맞았던 본지는 휴전 약 2년뒤인 1955년 4월 20일 판형을 타블로이드 판에서 대판으로 확대해 기사량의 증가를 꾀하며 복간했다. 지면 배치 또한 1면에 사설·학내보도를, 2면에는 교수논문과 에세이, 3면은 기획기사와 논단을 마지막인 4면에 학생 문예작품을 실어 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학우들에게 전했다.  


한국전쟁의 불길이 잦아든 후 우리 대학은 새로운 발전을 위해 신당동 교사를 대신할 새로운 캠퍼스의 신축을 도모했고 최종적으로 한남동 부지가 정해졌다. 본지는 우리 대학의 새로운 시작을 가장 구체적이고 가까이에서 취재하며 한남동 시대의 출발을 함께했다. 본지 역시 한남동 서울캠퍼스로 이전하며 대학 신문사의 기본적인 모습을 조금씩 꾸려나갔다.


창간 후 12년이 지난 1959년, 본지는 100호를 돌파하며 기존 4면에서 8면 체제로 전환해 더 많은 정보와 소식을 취재해 알렸다. 

 

지령 100호 돌파와 ‘단국문학상’
또한 이를 계기로 ‘제 1회 단국문학상’을 창설해 학생들의 문예와 지식을 엿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학생들과 소통하는 신문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많은 참여와 화제를 얻었던 이 문학상은 잠시 중단된 후 1977년 ‘단대신문 학술문학상’의 제정과 함께 다시금 부활했지만 2019년 이후 코로나19를 포함한 각종 이유로 다시 멈춘 상태다.

 

2. 70·80년대 학생운동 
격통<激痛>의 시대와 타오르는 불꽃

우리의 치열했던 70·80
정의와 함께 타오르는 불길

꺼지지 않도록 불어 넣은 숨
굴하지 않고 이어진 기록의 가치


민주화 운동의 격통은 한 시대를 뚫고 지나갔다. 독재 정권과 신군부 정권의 탄압이 이어졌고, 통제와 억압에 대한 반발의 불꽃이 함께 타올랐다. 4·19 혁명을 비롯해, 5·18, 6·10 민주 항쟁까지. 그 모든 시간의 곁에서 본지가 함께했다.

 

정의의 깃발을 내걸다
1960년 5월 1일 106호를 통해 4·19 관련 보도가 시작됐다. 4·19 혁명에 관한 기사, 교수단을 중심으로 4·19 피해자를 추모하고 변화를 촉구한 4·26 데모에 관한 기사가 이어졌다. 해당 기사에서는 교내 희생자 및 항쟁의 피해자를 애도하고 기성세대를 비판하며 시대의 변화를 촉구했다. 이어진 1960년 6월 11일 109호에는 5월 3일 우리 대학 내 민주화 데모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故김성수 학우의 총상 및 사망 사실 전달, 추모 기사를 통해 군부 정권의 위협과 학내외 민주화 운동 소식을 보도했다. 당대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관련 보도를 이어 나가는 불꽃의 시작이었다.

 

뜨거웠던 시대를 담다
불꽃은 멈추지 않았다. 신군부 정권의 탄압을 비판하는 사진 보도가 1980년 5월 8일 573호를 통해 게재됐다. 전경과 대치하는 재학생 사진, 학생들의 가두진출에 대해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 교내의 평화적 시위와 교문 밖 진출 중 경찰과 충돌해 쓰러진 재학생(김홍주 군)의 사진을 종합 보도했다. 


또한 박희준(중어중문) 학우의 시를 통해 민주화 운동과 신군부 정권에 대한 재학생들의 마음을 표현했다. 민주화 운동의 참상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재학생을 대표하면서도  한 시대를 격렬히 통과해나가던 우리 대학의 모습을 담아냈다.

 

진실을 요구하다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부터 5년이 지난 1985년에도 보도는 멈추지 않았다. 1985년 5월 14일 706호에는 우리 대학에서 3일간 진행한 광주 사태 위령제에 관한 보도가 담겼다. 1988년 5월 17일 781호에는 5·18 특집호를 발행했다. ‘책임자 처벌은 민주화의 전시’ 기사를 통해 민주화 운동의 탄압에 대한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또한 문병란 시인 특집으로 진상규명에서부터 해결점을 모색할 것을 강조했다. 민주화 관련 이슈를 지속적으로 기록하고 보도하며 본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시간이었다.


1988년에는 광주항쟁에 관한 진상규명 요구가 이어졌다. 1988년 5월 18일 광주항쟁진상규명을 주장하며 분신을 기도한 우리 대학 재학생 故최덕수 열사에 관한 보도가 단대신문 782호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어진 5월 31일에는 최덕수 열사의 장례 행렬을 보도했다. 이후 천안캠퍼스에서 ‘최덕수 학형 분신 항거 계승 및 광주학살원흉처단을 위한 범단국 1차 대궐기회’ 개회 사실을 신문에 실었다. 진실을 쫓고 진실을 요구한 사람을 신문에 담아 기록하는 것이 본지의 일이었다. 민주화의 마지막까지, 불꽃이 타오르는 순간을 함께하며 그 모든 시간을 담아냈다.

 

3. 캠퍼스 신설과 이전 
새로운 터전의 단국과 함께하다


천안캠퍼스,
지역사회 공헌 확대하다

죽전캠퍼스,
혼란을 이겨내고 자리잡다

 

낙원동에서 시작해 서울(한남)캠퍼스, 천안캠퍼스 그리고 지금의 죽전캠퍼스까지 우리 대학은 길고 긴 발전의 여정을 걸어왔다. 본지는 발전의 순간을 세세히 기록하며 대학신문으로서의 제 역할을 수행했다.

 

천안캠퍼스의 첫 시작을 기록하다
서울(한남)캠퍼스를 바탕으로 활발한 대학 활동을 이어오던 우리 대학은 대학의 사회봉사 기능 반경을 확대하기 위해 충남 천안시에 새로운 캠퍼스를 신설할 계획을 세웠다. 토지 매입을 포함한 개괄적인 소개를 본지에서 엿볼 수 있으며 완공 일정과 건물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 지역 사회에 공헌할 것이라는 우리 대학의 포부를 담은 기사로 천안 캠퍼스의 첫 시작의 순간을 함께했다. 또한 완공까지 각 건물의 상세한 공사 과정을 사진과 보도로 담아 학생들에게 새로운 캠퍼스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을 돋구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1978년 3월 9일 510호에서 천안캠퍼스 개교식 보도를 통해 산업대학 경영학과, 농학과, 전자공학과, 건축공학과, 토목공학과 5개 학과 총 350명의 신입생이 들어왔음을 알렸다. 본지는 우리 대학과 충청남도 지역사회 발전의 걸음마를 꾀하는 천안캠퍼스의 첫 도약을 생생히 담아 기록했다.

 

한남 단국에서 죽전 단국으로
우리 대학은 더 큰 발전을 목표로 죽전 캠퍼스의 신설을 계획한다. 그리하여 서울(한남)캠퍼스를 매각하고 약 8배의 큰 규모를 가진 죽전캠퍼스 부지를 매입했으며, 이전 계획 또한 꼼꼼히 수립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다양한 어려움 존재했다. 


서울(한남)캠퍼스 매각과 죽전캠퍼스 부지 매입 과정에서 재단이 사업을 비공개로 진행하면서 대학 구성원 간의 불신을 초래했다. 설상가상으로 부지 매수자와 시공사, 시행사까지 연달아 부도가 나며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에는 제3캠퍼스에 대한 반대운동 또한 이뤄졌다. 본지는 1997년 9월 2일 972호부터 980호까지 ‘기획! 신캠퍼스’라는 이름의 죽전 캠퍼스 관련 기획 보도를 통해 신 캠퍼스 사업의 상세한 설명, 발전 방향 등을 다뤘다. 우리 대학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중단됐던 죽전 캠퍼스 공사가 3년 11개월 만에 재개하자 본지는 상세한 일정과 조감도 등을 기재했다. 길고 길었던 공사 끝에 2007년 2학기 죽전캠퍼스로의 이전이 완벽히 이뤄졌고, 본지도 2007년 9월 24일 1205호를 기준으로 죽전캠퍼스에서의 발행을 시작했다. 

4. 혁신과 뉴미디어
다양한 방식으로 단국을 표현하다

인쇄 방식과 편집 체제의 변화
SNS를 이용한 뉴미디어 운영

더 활발하게 소통하며 성장

다양한 비주얼, 지면에 활력


시대가 변화하면서 본지에도 혁신의 바람이 불었다. 체제의 변화와 새롭고 다양한 도전은 독자들로 하여금 기사를 보다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끊임없는 혁신, 독자와 가까이
새로운 인쇄 방식의 도입과 새로 편집 체제에서 가로 편집 체제로의 전환은 신문의 전반적인 가독성을 향상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90년대부터는 컴퓨터 전산 체제를 도입하고 컬러면을 사용하는 등 시대에 발맞춘 변화가 잇따랐다. 


과거에는 원고지에 글을 쓰고, 필름을 인화해 사진을 첨부하며 신문을 만들었지만 현재는 기사 작성, 원고 수합, 첨삭 등의 모든 과정을 온라인으로 진행하며 신문 제작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있다. 또한 독자들의 편리한 학보 이용을 위해 1500호부터는 베를리너판으로 판형을 축소해 발행한다. 

 

이제는 지면 밖으로
온라인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중요성이 날로 더해지면서 홈페이지 개설과 SNS 활동을 통해 학생들의 접근성을 높였다. 1999년 개설된 단대신문 홈페이지는 온라인으로 간편하게 신문을 볼 수 있도록 지금까지 꾸준히 운영하고 있으며 이후 카카오톡 채널, 에브리타임,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SNS 채널을 차례로 개설해 독자들이 더욱 쉽고 간편하게 본지를 접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대학 신문의 위기라는 말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지금, 본지는 지면을 벗어난 온라인과 SNS 콘텐츠로 학보사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그림으로 세상을 담아내다
오직 글로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 그려진 일러스트나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만평은 때론 몇 개의 기사보다 강한 파급력을 가진다. 디자인부의 상징적 코너인 만평은 단대학보 5호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유서깊은 코너다. 학내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이슈를 비판하며 대학 신문으로서의 정체성과 시사성을 한 번에 사로잡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만평을 포함한 다양한 일러스트들은 신문의 활력을 불어넣어주기도 했으며, 적절한 조화를 통해 본지가 말하고자 하는 의제를 더욱 선명하고 강력하게 전달해줬다. 


1500이라는 숫자는 대상에 따라 의미나 정도를 달리하지만, 수많은 기자들이 힘을 모아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하며 만드는 신문이 1500번의 발행을 맞이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본지는 교내와 사회에서 발생했던 수많은 일들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다. 

 

Epilogue
이렇게 학생 기자들이 75년간 하나 하나 쌓아올린 금자탑은 단국의 역사가 됐다. 그러나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매번 마지막 신문을 낸다는 마음가짐으로 계속해서 우리 대학의 대표 언론기구로 자리매김하도록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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