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내게 박완서의 소설은 맛깔스러운 성찰의 시간을 제공해 준다. 강변 아파트 칠동 심팔층 삼호를 배경으로 하는 「황혼」에는 시어머니를 지칭하는 ‘늙은 여자’와 며느리를 지칭하는 ‘젊은 여자’가 등장한다. 어느 날 젊은 여자의 친구들이 시어머니가 만든 오이소박를 칭찬하자 하는 말이, “우리 집 노인네 솜씨야”라는 것이었다. “늙은 여자는 그 말이 섭섭해 며칠 동안 입맛을 잃었다.”, “감기 기운만 있어 봬도 노인네가 옷을 얇게 입으시니까 그렇죠.” 위로한다고 쓴 말이지만, 어떤 말이든 시어머니 마음은 편할 리 없다. 소설의 한 장면이니까 고부간의 갈등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되돌아보면 가정 내에서나 주변의 친한 사람들에게 무심코 ‘노인네’라는 말을 쓸 경우도 있다. 더 심하면 ‘노친네’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해 보면 ‘노친네’는 ‘노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돼 있다.
대학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서울 생활은 처음이었는데, 동기들 중 내 말투를 흉내 내는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내 고향은 강원도 홍천이므로 내 말투는 서울 표준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해 왔는데, 다소 억센 억양을 흉내 내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친근함을 표현하는 태도겠지 하다가 한 번은 가볍게 “지랄 그만해!”라고 말했다. 그 순간 그 친구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사전적 의미에서 ‘지랄’은 ‘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말을 수도 없이 듣고 자랐다. 아마도 ‘속됨’의 의미보다는 ‘분별없이’ 또는 ‘과장된 행동’에 초점을 맞출 때 이 표현을 썼던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표현한 말이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말의 상처’라고 부른다. 거리감이 없기 때문에 가벼운 욕설을 할 수 있다거나 낮잡아 쓰는 말을 쓸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의 캐릭터라고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남을 위로한답시고 무심코 내뱉는 말은 청자의 상황에 따라 말의 상처로 남는 경우가 많다. 겸양의 표현으로 쓴 “저는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맡게 됐습니다.”라는 말도 그 일을 맡을 수 없는 사람이 들었다면, ‘잘났어. 정말!’이라는 반응을 보일 수 있고, 자신이 청자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음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을 경우도 청자의 입장에 따라 불편하게 들릴 경우도 적지 않다. 위로의 말도 마찬가지다. ‘말은 청자의 몫’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배려하는 말하기, 배려하는 행동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대가 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