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기’와 ‘신독’
‘무자기’와 ‘신독’
  • 허재영(교육대학원) 교수
  • 승인 2023.11.07 14:26
  • 호수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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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캇시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자기 인식이 철학적 탐구의 최고 목표’라는 전제 아래 “인간은 쉴 새 없이 자기 자신을 찾는 피조물”이라는 답을 도출한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반성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는 명제로부터 인간은 스스로 책임을 지는 존재이자 도덕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지성사에서 고대 그리스의 학문이 탈레스와 같은 자연철학으로부터 소피스트의 인간 철학을 거쳐 소크라테스의 자기반성으로 이어진 것은 인식 발달의 순서로 볼 때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논어』에는 “공자께서는 괴력난신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구절이 나온다. 괴력난신은 괴이하고 어지러운 것, 귀신 이야기 등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는 인지가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현상을 괴이하게 여긴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비해 공자의 철학은 ‘효제충서(孝弟忠恕)’로 요약된다. 효도와 우애, 진실과 관용은 사회생활의 기본 자질이다. 그 후 동양 고전 『대학』에서는 “성(誠)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니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 삼간다”고 하였다. 즉 ‘무자기(毋自欺)’와 ‘신독(愼獨)’은 자기를 반성하는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이는 인문학의 요체일 수밖에 없다.


분야는 다를지라도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로 알려진 에리히 프롬이 ‘사랑’도 ‘기술’이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체”라고 정의하면서,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즉 사랑은 본질적으로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주는 것’은 ‘포기하는 것’,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행위’를 통해 ‘나의 힘, 나의 부(富), 나의 능력’을 경험하고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으로부터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이기심은 진정한 ‘자기애(自己愛)’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논리는 신경정신과 교수 김중술이 저술한 『사랑의 의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사랑도 이성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능력”이라고 규정하면서, 사랑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자아정체성’이라고 강조한다. 사물을 흑백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 한 번의 부정적 사건을 끝없이 자신의 실패처럼 인식하는 과잉 일반화, 과대망상 등은 전형적인 사고 왜곡의 유형들이다.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본다’라는 속담은 자기반성 없이 남만 탓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교훈이다. 자기 비하나 타인에 대한 비방은 자기반성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모든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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