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지속가능성은 양립 불가능하다. 패션의 다른 말은 유행으로, 끊임없이 새로 탄생하고 확산하고 쇠퇴하는 주기를 반복한다. 즉 유행의 끝없는 생산과 소비를 기반으로 한다.
반대로 지속가능성은 생존의 문제로, 현재의 생산과 소비 시스템을 탈피하는 것이 과제다. 계속되는 확산과 성장과 팽창을 멈추고, 회생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패션은 본질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유행을 만들어야 하는 패션에서 지속가능성을 논할 수 있는가?
지속가능성의 역설은 패션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가 내놓는 여러 대안은 충분하지 않다. 순환 경제를 내세우며 재활용 기술을 개발해도 월등히 높은 생산량과 소비량에 자원은 여전히 낭비되고 매립지는 넘쳐난다. 그래서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과정의 끝은 인간 존재의 부정인 경우가 많았다. 인간이 생존하는 한 지구는 소모되고 황폐해질 것이라고. 이 지점까지 오면 한 걸음 물러나야 한다.
죽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것으로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기에는 일상을 지속해야 한다. 따라서 지속가능성 논의의 결론은 불완전의 수용, 끊임없는 타협이다.
ESG는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기업이 장기적으로 사업을 잘 운영하기 위해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관리해야 한다는 관점은 논리적으로 완벽했다. 기업이 ‘착해야’ 한다기보다는 원활한 비즈니스를 위한 냉철한 행동이 사회환경적으로도 이로운 방향인 것이다. ESG는 기업이 행동해야 하는 이유를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 설명해 줬기 때문에 똑똑한 방법이었다. 도덕과 윤리는 지나치게 순진하고, 자본주의는 현실이니까.
그런데 정말 그럴까? 도덕과 윤리는 기업활동에서 배제할 수 없다. 패션 기업의 노동 이슈가 그리 치명적인 이유는 비윤리성 때문이다. 미주리 대학의 교수 Jung ha-brook shire는 ‘도덕적 주체’로서 기업이 가지는 의무를 탐구한다. 개인 하나하나가 경제적 주체인 동시에 도덕적 주체이듯, 기업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에게 도덕적 의무가 있듯, 기업도 같은 의무를 지는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주체로 인식한다. 도덕과 윤리는 이미 기업 이미지, 가치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ESG 역시 한계가 있다. 포화한 생산과 소비에는 의문을 가지지 않고, 비서구 국가에 전가된 노동 구조도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ESG는 ‘현실적인’ 논의인가? 바꾸지 않기 위한 허울 좋은 방법인 것은 아닐까? ‘ESG 도입의 목적론적 체계의 한계, 대안’이라는 논문에서는 ESG를 재무성과와 연결하는 목적론적 관점이 기업이 사회적 주체로서 가지는 책임을 망각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기업은 오직 경제적 주체일 뿐인가? 우리가 지속가능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필히 자본주의적 시스템과 마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윤리와 도덕에 관한 논의는 정말로 순진한 이야기에 그칠까?
김희량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