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제1차 세계대전 (2)
⑥ 제1차 세계대전 (2)
  • 조한승 교수
  • 승인 2008.04.14 01:36
  • 호수 1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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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자국의 군수물자 수출 기회로 삼은 미국의 야욕

세력균형·동맹체제에 대한 환상 깨트려

1914년 7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했다. 독일의 빌헬름 황제가 기대했던 것처럼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는 독일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국내정치적 상황은 니콜라이의 뜻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베르사이유 조약을 위해 모인 승전국 관계자들의 모습.
발칸은 러시아의 영향권이라고 믿고 있었던 범슬라브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강경한 대응을 원했다. 그들은 유럽의 변방으로 멸시받았던 러시아가 이참에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어야 한다면서 전쟁을 주장했다. 게다가 공산혁명을 우려한 귀족들은 국내정치적 위기를 해소하는데 전시체제가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러시아가 동원체제에 들어가자 독일도 러시아와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했다. 한편 영국은 독일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하면 영국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바로 마주보게 되기 때문에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영국이 결국 중립을 지킬 것이라 오판한 독일은 8월에 벨기에를 침공했고, 영국은 전쟁에 개입했다.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터키는 독일과 제휴하여 러시아와 싸웠고, 불가리아도 세르비아가 발칸의 맹주역할을 자처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독일 편에 붙었다. 한편 일본은 영일동맹을 근거로 중국에서 칭다오의 독일 해군기지를 공격했다. 3국동맹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는 동맹의 원칙이 ‘방어’에 있다는 이유로 오스트리아의 공격전쟁에는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했다.

미국은 유럽에서의 전쟁을 자국의 군수물자 수출의 기회로 삼았고, 주로 영국에 물자를 공급했다. 이에 독일은 잠수함 등으로 영국의 항로를 봉쇄하였으나 미국은 자유항해를 주장하며 계속 영국에 상선을 보냈다. 결국 미국의 상선이 독일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미국 개입을 우려한 독일이 멕시코를 포섭하기 위해 텍사스를 되찾게 도와주겠다는 비밀문서를 멕시코에 보내다가 이것이 미국에 포착되었다.

격노한 미국은 1917년 참전을 결정하였고, 윌슨 대통령은 이 전쟁의 목적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으로 선언하였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사망자는 이미 1500만 명에 이르렀다. 누구도 전쟁이 이렇게 참혹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베를린에서 그리고 파리에서 전선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탄 젊은 병사들은 너도나도 영웅이 되어 돌아오겠다는 생각만 했지 싸늘한 시신으로 전장에서 죽어갈지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100년간의 평화 속에서 전쟁의 참화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참호전과 소모전이라는 새로운 양상의 전쟁은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러시아에서의 공산혁명은 전쟁의 주체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 전쟁은 끝나고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독일은 황제가 물러나고 공화정이 선포되었으며 무장해제 당했다. 오스트리아와 터키 제국이 붕괴하고 민족자결주의에 근거해 여러 작은 민족국가들이 독립하였다.

당시에는 ‘대전쟁’으로 불렸던 1차 대전의 종식은 평화에 대한 염원을 불러일으켰다. 전쟁은 세력균형과 동맹체제에 대한 환상을 깨뜨렸으며,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했다. 이에 따라 집단안보를 위한 국제연맹이 수립되고 부전(不戰)조약이 체결되었다. 민주주의나 민족주의 같은 추상적 이념이 전쟁의 중요한 가치로 등장했다.

그러나 시련은 계속되었다. 제국주의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지만 민족자결은 여전히 유럽에만 한정된 것이었다.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승전국 치하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못했다. 각국은 여전히 개별이익을 포기하지 못하고 표리부동한 태도를 보였으며, 그 결과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더 참혹한 전쟁으로 나타났다.

조한승 교수
조한승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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